[중앙시평]세계금융시장 왜 냉담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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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동안 국제통화기금 (IMF) 이 요구하는 구조조정도 착실히 이행하려 노력했고, G7국가들의 지원도 받고 있지만 세계금융시장의 한국에 대한 냉랭한 분위기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외국인 기관투자가들에게 단기외채를 회전해 주지 않고 한국시장을 멀리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즉 믿고 돈을 빌려줄만한 금융기관이나 기업이 그리 많지 않은데다 IMF와 약속한 금융.실물경제의 개혁을 밀어붙일 의지도, 능력도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IMF의 지원을 받기 전에도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국제기준에 비춰 보면 부실을 면치 못했고 재벌을 포함해 대기업.중소기업 할 것 없이 많은 기업들이 경영위기를 맞고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요즘처럼 30%를 넘는 고금리와 널뛰듯 오르내리는 환율의 불안이 계속된다면 살아남을 기업이 얼마나 될 것이고, 은행인들 기업도산으로 부실자산이 쌓인다면 무슨 수로 그 많은 외채를 상환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어 온다.

물론 그중에는 전망이 좋은 기업과 금융기관도 있겠으나 워낙 기업통계가 부실하고 정보도 정확하지 못해 견실한 기업들을 가려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불평과 우려를 귀담아 듣는다면 앞으로의 정책운영 방향이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구조조정을 서두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최대한 기업의 흑자도산을 막는 일이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와 합병.통폐합 등의 금융산업 개편은 성격상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

그러나 산업과 기업의 구조조정은 기업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다.

외국인들은 요즘처럼 기업을 경영하기 어려운 때에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하듯이 비용절감.생산성 향상을 위해 사업과 투자를 대폭 조정하고 인력을 재배치.감축하는 등의 대수술을 추진하는 기업들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어온다.

기업들의 외화.원화 부채는 얼마나 되며 이를 어떻게 줄여 재무구조를 개선할 것인지 계획도 없으며, 재벌기업들의 투명하지 못한 경영과정이 그렇게 문제가 돼도 어느 기업 하나 외국인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리 스스로 살펴봐도 앞으로 구조조정의 고통과 이에 따른 갈등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사회적인 신축성이나 내성 (耐性) 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연이은 기업의 부도.실업증가.물가상승, 그리고 분배의 악화 등이 이미 분열돼 있는 사회조직을 더욱 불안정하게 한다면 정부가 IMF나 G7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계속 밀고 나가기 어려울 것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이러한 구조개혁에 대한 의구심을 불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세금을 얼마나 더 내야 하고, 임금을 얼마나 내려야 하고, 실업자를 지원하기 위한 비용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하겠고, 이 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져야만 외국인들이 우리의 구조조정 결의를 믿어줄 것이다.

우리 경제에 대한 외국인들의 우려를 감안할 때 IMF의 요구조건에도 문제는 있다.

금융.재정의 긴축이 계속돼 새로운 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기업들이 도산을 면치 못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의 외채상환 능력은 더욱 더 악화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외환위기 초기에 환율의 움직임이 불안정한 단계에는 금융긴축이 불가피한 처방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이 처방대로 경제를 운영한 나라들은 예외 없이 장기 침체를 경험했다.

특히 한국같이 수출의존도가 높은 경제에서 지나친 금융긴축은 저투자→경쟁력 약화→수출감소→외채상환능력 저하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IMF와 G7이 요구하는 구조조정의 목적은 우리나라 기업이나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재산을 싸게 팔아버리는 빚잔치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회생시켜 외채 상환능력을 배양하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율이 안정되기를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아니라 환율.금리의 안정을 위해 금융긴축을 완화해 금리를 내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IMF로부터 이러한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서도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이 신속하고도 구체적으로 가시화돼야 할 것이다.

박영철 <고려대 경제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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