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집 헐고 논밭 뺏고 강제노동 … 일제 수탈 통로 역할 한 신작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1면

 신록 예찬이 절로 나오는 봄날. 신작로에 줄지어 늘어선 플라타너스의 새싹이 눈부시게 찬연하다. 그러나 민초들의 피와 땀이 가득 배어 있는 우리 근대 도로의 역사를 떠올리면 마음이 서글퍼진다. 1906년 통감부는 탁상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 직선을 그어 나갔다. 이듬해 대구∼포항, 목포∼광주, 군산∼전주, 그리고 평양∼진남포를 잇는 도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연장 741㎞ 직선대로가 대한제국의 예산, 사로잡힌 의병과 끌려 나온 농민들의 피땀으로 만들어졌다. 곡창과 광물 산지와 일본행 수송선이 들고 나는 개항장을 잇는 수탈의 통로였던 이 길은 애초부터 이 땅 사람들의 편익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한반도의 영구 지배를 노렸다. 이제 신작로는 행정과 군사 요충을 중심으로 거미줄마냥 촘촘히 깔려 나갔다. 장터와 포구, 관아와 마을을 휘감으며 물자만이 아닌 사람들 사이의 정을 이어주던 옛길은 허리가 뭉텅 잘려나갔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옛 관례를 핑계 삼아 대가 없이 도로용지와 노동력을 빼앗고 부린 건설 방법은 통감부 때와 매한가지였다. “치마끈 졸라매고 논 사놓으니 신작로 복판에 다 들어가네.”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 되네.” 목숨보다 귀한 땅과 집을 앗긴 농민의 애통한 마음이 절절한 민요가락이 눈물겹다. 1936년 3월 2일자 동아일보는 “도로개수 공사에 부역 철폐하라”고 일갈했다. 새로 길이 생기면 땔감과 곡식을 나르던 농민들의 일감을 화물차가 빼앗아 갈 것이고, 승합차도 중류 이상이 탈 뿐인데 도로공사를 그네들의 부역에 기대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이다.

『삼천리』 1935년 3월 호에 실린 이태준의 소설 ‘나무는 심어 놓고’의 한 대목은 땅을 앗기고 서울을 향해 길을 재촉하는 민초들의 눈에 신작로가 어떻게 비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길고 어마어마하게 넓은 길. 눈이 모자라게 아득하니 깔려 있는 긴 길. 눈에도 설거니와 발에도 마음에도 선 길이었다. 앵앵하는 전봇줄 소리도 멧새나 꿩의 소리보다도 엄청나게 무서웠다. 자동차가 지날 때는 물론 자전거만 따르릉하고 와도 허둥거리고 한데 모여 길 아래로 내려서면서 서울을 향해 타박타박 걸을 뿐이었다. ‘플라타너스 가로수 아래 길을 묻던 등짐 진 농군(사진)도 자동차에 길 중앙을 내주고 눈치 보며 길가로 다녔으리라(사진=『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노형석 저 이종학 사진, 생각의 나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넘던 꼬부랑 고개가 새삼 그리운 오늘이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