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이 참담한 세월을 넘자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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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 재무부 차관과 국제통화기금 (IMF) 관계자들을 만나본 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가 내뱉은 말 - . "오늘이 어떨지, 내일이 어떨지 모를 만큼 심각하다" 는 말은 그에게 뿐만이 아니라 온 국민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우리의 외채규모를 그들이 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金당선자는 더욱 아연했던 것 같다.

그가 정부 관계자에게 "도대체 당신들은 그동안 뭘 했느냐" 고 호통칠 때 그 심정이 오죽이나 참담했으랴. 우리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지 (選擇肢)가 없다는 사실이다.

싫으면 배짱을 내밀어 볼 수도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기는커녕 싫다는 표정조차 감춰야 할 판이다.

IMF는 우리에게 재벌의 해체와 투명성을 요구했다.

뭘 잘못했고, 뭘 감췄길래 우릴 보고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인가.

솔직히 불쾌하고 싫다.

그러나 대안이 없다.

감 놓으라는데 배를 놓겠다고 우겼다가는 하루 아침에 국가부도사태에 직면할 판이니 속절없이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제집의 가계부조차 제대로 적을 줄 모르는 주제가 됐는데 대안이 있다 한들 씨알이나 먹힐 일인가.

안보는 진작에 그렇게 됐지만 이젠 경제까지도 남의 손에 맡기는 신세가 됐다.

안보와 경제, 명색이 독립국가로 이름붙일 수 있기 위한 이 두 기둥을 내 손으로 부둥켜 안지 못하는 이 나라, 이 국민은 뭔가.

누구를 원망할 겨를도 없고 원망해서도 안된다.

우리가 남북 대치라는 족쇄에 걸려 사는 것도, 빚잔치하다가 덫에 걸려 신음하는 것도 모두 내 탓이다.

구한말에 나라를 잃었던 것은 열강들의 각축 때문이었지만 우리 자신이 명민 (明敏) 하지 못해 그리 됐듯이 오늘의 이 참담한 상황도 허장성세를 진짜 제 실력인 줄로 아는 착각에서 비롯됐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애걸해서라도 국가부도사태만은 면하고 보는 수밖에 없다.

가령 부도가 난다면 우리의 형편은 북한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기름 살 돈 없고 양곡 살 돈 없다면 우리의 몰골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 된다.

설마하니 미국이 부도사태까지 방치하겠는가, 그들의 안보적 이해가 막중하고 경제적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니 부도만은 막아 줄 것이다 (?) .그걸 그나마 든든한 시나리오라고 상정한다면 이 나라는 정말로 정신까지 빼앗기는 나라가 된다.

옛날 한신 (韓信) 이 바짓가랑이 밑을 기어 지나갔을 때 그의 머리 속엔 원모 (遠謀)가 깃들여 있었다.

오늘의 수모보다 내일의 설계가 소중했던 것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오로지 와신상담, 이 수모의 계절을 이겨내고 내일을 도모할 해법 (解法) 을 모색해야 한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이 분명한 이상 남의 손에 매를 맞느니 스스로 바지를 걷어올리고 내 손으로 매를 치는게 낫다.

그렇게라도 자존심만은 지켜야 할 게 아닌가.

각계에서 지금 자구노력이 진행 중이다.

그 강도는 전례가 없을 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눈 앞에 전개되는 상황부터가 비견할 전례가 없으니 그도 그럴 것이다.

이미 대마불사 (大馬不死) 의 신화는 깨졌다.

은행이 넘어지고 종금사가 문을 닫는 사태도 처음이다.

환율이 2천원대를 넘나들고, 금리가 법정상한을 뚫고, 주식시장이 붕락하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이다.

과거 오일쇼크 때도 '모라토리엄' 을 운위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의 간판급 재벌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리고 신문.방송사까지 초읽기에 몰린 상황도 전대미문이다.

대량 실업사태는 또 어떤가.

그러니 자구노력 역시 전대미문일 수밖에 없다.

재계로 말하면 한 재벌 단위의 해법으로는 어렵다.

금융기관이 업종단위로 구조조정 작업을 벌여야 하듯이 재계도 전경련을 중심으로 공동의 조정작업을 거쳐야 할 것이다.

예컨대 전문화의 심화작업이다.

A그룹은 자동차, B그룹은 전자라는 식으로 자회사를 맞바꾸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실업대책에서도 노.사.정이 합심해 '신사회 계약' 을 체결하는 발상전환이 절실히 요청된다.

전국민이 자린고비 정신으로 재무장하는 노력도 초미의 과제일 것이다.

이제 '설마' 는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안이한 대처로는 공멸 (共滅) 밖에 없음을 절감할 때다.

고흥문 <전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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