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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한·미동맹이 필요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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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의 외교안보 문제가 국민적 관심사가 된 것은 DJ정부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한국에서 국민적 관심사는 정치와 경제였고 특히 정치민주화가 주요 화두(話頭)였다. 정권교체가 실현되고 쿠데타가 불가능한 시기가 되면서 관심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외교안보 문제로 넘어갔다. 그동안 정치민주화에 대한 이슈는 주로 반독재 세력.민주화 세력이 제기해 왔다. 반면 외교안보 시스템 불안에 대한 논쟁은 주로 과거 집권 세력.보수 세력이 제기해 왔다.

공교롭게도 YS정권 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북한 핵문제는 이런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외부적 자극까지 곁들여지다 보니 북한 핵을 포함한 남북 문제, 한.미동맹 문제, 중국 등 주변국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 문제 등 고도로 복잡한 국제정치.안보.정보 이슈가 전 국민적 관심사이자 민감한 정치투쟁의 단골 소재가 됐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두차례에 걸친 대통령선거를 통해 민주화 세대.광주항쟁 세대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 집단으로 확인되면서 이 논쟁은 세대갈등과도 중첩됐다.

이 기간 서울에 주재하는 주한 외국대사관 정세분석팀들의 상황인식도 우리의 외교안보 논쟁과 묘하게 결부됐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상황인식과 정세분석은 국내외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문제는 이들의 인식과 판단이 과거의 전통과 관성에 집착하다 보니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는 것이다.

지난 4.15총선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총선 후 서울 외교가에는 미국과 일본의 정보.정세 분석이 중국.러시아에 참패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국 총선 결과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열린우리당의 제1당 부상이 어렵다'는 쪽이었고 막판에 가서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였는데, 중국과 러시아는 제1당 부상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는 게 소문의 골자였다. 더군다나 이날 드러난 주변 4강의 정보성패는 지난 대통령선거 결과에 대한 예측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충격은 소리없이 확산됐다.

한국에서 미국과 일본이 한국 정치세력의 변동과 사회의 흐름을 짚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는 이외에도 여러 군데에서 감지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미, 한.일 양국의 서로 의도하지 않은 충돌과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효순.미선 양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군이 초기에 적절한 대응만 했어도 이런 정도로까지 확대될 이유가 없었다. 이 사건은 반미와는 상관없는 '주한 미군과 한국 소녀' '미군의 부적절한 처신과 이를 응징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 '한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듯한 미군사령부와 미국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뒤섞인 시위였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이 미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은 변화된 한국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한국을 과거 시절의 패턴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386이 한국 사회를 장악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 자체가 미국도 신봉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에 충실한 본질적 발전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미국도 서로의 변화를 인정해야한다. 서로에게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과거의 시스템은 이제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중국의 영향력 증대가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한.미동맹의 미래는 한.미동맹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와 보장과 같은, 포괄적 가치 동맹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한.미동맹은 군사적 경직성에만 갇히기에는 그동안 흘린 피와 땀과 가치가 너무나 크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