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외환위기자료 훼손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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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직인수위의 국가공문서 파기중단 요청과 관련해 청와대가 정부의 문서관리규정에 위배되는 파기행위는 있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 당장은 하루하루의 외환위기를 넘기느라고 정신이 없지만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외환관리정책이 결정됐는지의 진상은 언젠가는 밝혀져야 한다.

이는 특정인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하는 마녀사냥식의 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자료로 삼기 위해서 그렇다.

아직도 많은 국민이 왜 정부가 외채통계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는지, 상황이 그토록 심각하게 진행되도록 부실종금사의 건전성 감독을 소홀히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고용조정이 전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국민에게도 납득이 가는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담당공무원 중 일부가 회의록이나 관련자료를 파기하는 사례가 있다면 엄중하게 의법조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재정경제원의 실무과장이 올 3월부터 재경원의 고위층이 실무진의 경고성 보고를 묵살했고 이 때문에 위기가 증폭됐다고 주장한 것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부부처의 정책결정 과정에서 고위층이 실무진의 의견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사후에 정책결정 과정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실무진이 올린 보고서나 고위층이 내린 결정에 관한 자료 등이 그대로 보관돼 있어야 한다.

이같은 반성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해 왔다는 외국전문가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현 정부 중 특정부처가 의도적으로 문서를 파기할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에 관련 정부기구는 최후까지 소임을 다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현 정부 스스로 집권초기 청와대와 안기부의 문서 상당부분이 파기돼 국정파악에 애를 먹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국가적인 불행이다.

정책의 실수나 상황의 오판은 있을 수 있지만 벌어진 일을 없던 일로 지워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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