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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100명이면 나라 걱정 없다” 마운드 선 이상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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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호 06면

① 1921년 YMCA 대운동회에 참가한 체육 지도자들이 육상 출발선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장소는 삼선평(오늘날의 삼선교 부근) 또는 훈련원 터(지금은 헐린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었다. 훈련원은 조선시대 무과시험과 무예 훈련을 담당)로 추정된다. 왼쪽에서 둘째부터 이인영·홍병선·윤치호·김일선·김필수·이상재 선생. ② YMCA에서 보급한 야구의 초창기 경기 장면. 1920년대로 보이며 장소는 훈련원.③ 1905년 열린 육상경기.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선수들의 자세가 제각각이다. 장소 미확인.

암행어사가 되려고 죽어라 공부하던 호창은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졸지에 룸펜이 됐다. 삶의 목표도 없고 당장 할 일도 없는 그는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은 공이나 차며 시간을 죽일 뿐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낯선 집에 넘어간 공을 찾으러 들어갔다가 희한한 광경을 본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장갑을 끼고 공을 주고받는 모습이다.

한국 생활체육 한 세기의 산 증인, YMCA

2002년 개봉한 영화 ‘YMCA야구단’에서 조선 선비 호창(송강호 분)은 그렇게 처음으로 야구를 만난다.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데다 신여성 정림(김혜수 분)의 미모에 끌린 호창은 곧 ‘야구계의 퇴계 이황’ 격인 4번 타자가 된다. 때는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던 시절. YMCA야구단은 일본군 클럽팀과 일전을 벌이고, 영화는 이 경기를 전후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로 메워진다.

YMCA야구단은 신분을 초월해 능력 위주(사실은 닥치는 대로)로 구성된 팀인데, 아직 ‘신분’이 엄연한 때라 처음엔 팀워크가 엉망이다. 아랫것이 던진 공이라고 받지 않는 양반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과의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보아 왔듯 YMCA야구단도 경기력의 열세를 뒤집고 마침내 일본을 이긴다. 이 영화는 코미디지만 그래도 승리의 순간엔 코끝이 찡하다.

④ 1921년 11월 열린 전(全)조선야구대회 개회식에서 이상재(오른쪽) 선생이 시구하고 있다. 장소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 ⑤ 상투를 튼 선수들이 축구경기를 하고 있다. 장소와 시간은 확인되지 않았다. 1910~20년대 사진으로 추정된다. ⑥ 1909년 김규식 박사(등 돌린 사람)가 YMCA 운동장에서 청년학과 학생들에게 체조를 가르치고 있다. 당시 체조는 ‘체육’의 동의어였다. ⑦ YMCA의 사회체육 보급 의지를 보여 주는 1970년대 이동수영장. 트럭 짐칸 같은 곳에 물을 받아 어린이에게 수영을 가르쳤다. 사진의 배경은 북부 도봉지역.

호창이 야구하는 선교사를 처음 만난 낯선 건물은 황성기독교청년회관, 즉 YMCA회관이다. 한국에 YMCA가 창립된 것은 1903년 10월 28일의 일이다. 1899년 개화 청년 150여 명이 세계YMCA연맹에 한국YMCA의 창립을 건의했고, 4년 뒤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창립됐다. 창립 당시 YMCA 이사진은 장로교 5명, 감리교 3명, 성공회 1명으로 구성됐다.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는 YMCA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초창기 한국 스포츠의 발전은 YMCA를 빼놓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YMCA는 원래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단체다. 한국에 온 것은 물론 스포츠 보급이 아니라 선교 목적이 컸다. 그런데 YMCA는 왜 스포츠 보급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스포츠를 선교의 유용한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있다. 이 생각은 신이 머무르는 성전인 인간의 신체를 강건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YMCA의 스포츠 지도자 루터 귤릭의 정신으로 연결된다. 귤릭은 제임스 네이스미스를 격려해 겨울철 실내스포츠인 농구를 창안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보통 스포츠와 체육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엄격히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체육은 ‘신체운동에 의한 교육’, 스포츠는 ‘인간이 생활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즐거움을 얻기 위해 자주 실시하는 다소 경기적 요소가 있는 신체운동의 총칭’이다. 그러나 100년 전의 이 땅에 체육과 스포츠의 구분은 분명하지 않았다.

스포츠-체육 활동은 독립과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의 역할을 했다. 1909년 ‘유술부’가 창설될 때 초대 한국인 총무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장사 100명만 양성하면 나라에 대하여 걱정할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영원한 청년’으로 불릴 만큼 에너지가 넘쳤던 선생은 체육이 민족의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영화 속의 YMCA야구단이 일본군 클럽팀을 상대로 전의를 불태웠듯 근대 스포츠 태동기에는 일본으로 대표되는 ‘외세’라는 대척점이 있다. 체육과 스포츠 운동의 동력원은 외세에 맞서 국권을 지키고 나라를 부강케 하는 데 청소년의 근기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공감과 절실한 필요에 있었다. 경신학교의 1908년 교과 과정에는 체조와 교련이 포함돼 있다. 체조와 교련은 당시에는 체육과 동의어였다.

한민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말살 정책이 극심할수록 민족의식은 더욱 왕성했다. 민족 지도자들이 세운 학교에서는 체육 과목에 공을 들여 학생들의 신체 계발에 힘썼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 경전(효경)의 가르침은 몸을 상하지 않게 한다는 소극적 의미에서 신체의 개발과 단련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전환됐다.

YMCA는 ‘YMCA 사회체육운동 1세기 기념사진전’을 세종문화회관 광화랑에서 열고 있다. 20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에서 한국 근대 체육 태동기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전시회에서는 태동기 스포츠뿐 아니라 이후 해방과 6·25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YMCA를 중심으로 계속돼 온 사회체육운동의 역사적 맥락을 사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YMCA의 사회체육 100년사를 집필하고 있는 김재우 중앙대 체육학과 교수는 “YMCA는 우리 사회체육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해 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성을 가진다. 더욱이 스포츠 보급에 그치지 않고 일제 강점기를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도 상당 부분 공헌한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 땅의 민족 지도자들은 YMCA의 스포츠 운동에 공명했다. 당시 사진들 속에서 우리는 망국의 아픔 속에서 국권 회복의 근본을 청소년 육성에 둔 민족 지도자들의 눈물겨운 투혼을 본다. 맨 위 큰 사진은 1921년 YMCA 대운동회 때 육상 출발점에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한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모습에서 한국 스포츠 태동기의 호기심과 굳건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초창기 한국 스포츠의 현장을 엿볼 수 있는 사진들은 이제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 스포츠의 설렘과 새로운 것에 대한 적응 과정을 보여 준다. 야구경기의 시구를 맡은 이상재 선생이 공 받을 사람을 노려보는 모습은 곧 불 같은 강속구를 던질 듯한 기세다. ‘영원한 청년’으로 불린 선생의 기백을 느끼게 된다. 곁에 선 심판(혹은 포수)의 모습은 이채롭다. 그는 넥타이를 맨 채 보호장비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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