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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일본의 영컬처]上.영상문화로 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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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현대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온통 보고 즐기는 매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텔레비젼·비디오·전자오락·영화…. 여기에 학교 교육마저도 시각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야흐로 눈이 사물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감각의 전부인 '시각세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오감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존재다. 지금껏 기성세대에겐 이것이 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다르다. 이른바 시각 편중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과연 기성세대와 어떤 차이을 보이며 어떤 경향을 띠게 될까. 비슷한 과정을 한국보다 미리 겪은 일본의 사례를 조명해 보는 것은 이 점에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회에 걸쳐 '97 - 일본의 영 컬처'를 게재한다.

70년대는 일본 영 컬처의 역사상 최대 전환기였다. 74년작으로 대하소설 뺨치는 SF애니메이션 ‘우주전함 야마토’는 만화·애니메이션·특수촬영 영화가 ‘애들용’의 범주를 넘어서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소녀만화를 전철 안에서 당당하게 읽는 일류대학의 남학생에 대해서 당황을 감추지 못하던 기성세대의 놀라움이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다. 이때부터 일본 소년·소녀들은 좋든 싫든 시각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자라났다. 10년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이상함’에 놀라 ‘신인류(新人類)’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86년 마케팅 잡지 ‘소비와 유통’은 ‘지적 감성이 우수한 신인류’라는 글에서 80년대의 젊은이를 네가지로 분류했다. 뉴스탠더드파(구성비율 60%)·감성적 지성파(20%)·게임스맨파(15%)·내향적 모라토리엄파(활동의 일시정지 또는 유예의 의미·5%)가 그것이다. 풍요롭고 여유있는 생활을 지향하면서 현실주의적이고 체제순응적인 뉴스탠더드파나 청년실업가를 꿈꾸며 게임의 감각으로 비즈니스에 정진하는 게임스맨파는 기성세대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인류 세대의 이미지 리더층을 자처하는 감성적 지성파나 폐쇄적인 안정감이 존재하는 세계에 머물려는 내향적 모라토리엄파에 이르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이들의 등장은 기성세대와의 단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만화·특수촬영 영화 등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이들 젊은 매니어들-이른바 ‘오타쿠(お宅:매니어와 같은 의미)’-은 기존 일본인과는 다른 종족 같았다. 이제 30대가 된 이들은 일본의 시각·영상문화의 기수로 성장해 세계적인 크리에이터로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62년생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 그는 일본 매니어문화의 감성을 현대미술에 투사했다. 결과는 대만족. 서양에서 큰 호응을 얻는 것과 동시에 일본 현대미술의 새로운 정체성 확립자로서 위치를 굳혔다. 그가 만든 독창적 캐릭터는 화랑 전시에 이어 T셔츠의 디자인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관객 감소로 한때는 사망선고까지 받았던 일본 영화. 90년대 들어 일본 내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 올들어 기타노 다케시(北野武·50)감독이 베니스영화제에서,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71)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각각 그랑프리를 수상했던 게 대표적 예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시각중심의 문화속에서 나고 자란 젊은 감독들의 재능이 깔려있다고 봐야 한다. 96년 일본내 방화부문 흥행 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도 대호평을 받아 9백22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린 ‘함께 춤추실 까요?(Shall We Dance?국내선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의 감독 슈오 마사유키(周防正行·41). 성(性)구분을 허무는 트랜스섹슈얼 청춘영화의 기수로 프랑스에서 절찬을 받은 하시구치 료스케(橋口亮輔·35). ‘오카에리’라는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의 최우수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시노자키 마코토(條埼誠·35). 이들은 일본영화를 세계영화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게한 원동력이 됐다.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일본의 영화감독은 이와이 슈지(岩井俊二·34)다. 94년 ‘불꽃놀이’로 TV영화 사상 처음으로 일본영화감독협회 신인상을 수상한 후 ‘Fried Dragon Fish’‘Undo’‘러브레터’‘피크닉’등 연이은 히트작들을 내놓았다. ‘러브 레터’‘피크닉’은 국내 매니어들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 이와이는 이어 96년에 대작 ‘스왈로테일(호랑나비)’을 발표해 열광적인 이와이 매니어군(群)을 만들기까지 했다. 시작부분에서 ‘매드맥스 2’를 연상시키는‘스왈로테일’은 ‘블레이드 러너’같은 할리우드 영화는 물론 홍콩느와르영화와 정통일본영화의 연출기법을 교묘하게 조합했다. 이것이 바로 이와이를 비롯한 30대 영화감독들의 강점으로,그것은 이들이 수백편의 영화장면을 데이터 뱅크처럼 머릿속에 보유하고 있는 영상문화의 매니어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와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서로가 서로를 베꼈다. ‘바벨 2세’의 표절 시비를 부른 ‘터미네이터 2’. ‘터미네이터 2’를 다시 표절한 ‘드래곤 볼-미스터 부’. ‘골고 13’을 표절한 ‘다이하드’. ‘프레데터’를 표절한 ‘공각기동대’등 베끼기 행위는 이전부터도 암암리에 존재해왔다. 그러나 시각 편중의 일본 영 컬처는 적절한 표절을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기법’으로 당당히 평가하는 추세다. 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37),연출자 히구치 신지(木通口眞嗣·32)등 주요 제작스태프가 30대였던 ‘신세기 에반겔리온(관련 상품 매출액이 3백억엔을 넘어선 96년 최대의 히트 애니메이션)’은 수백 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표절했으면서도 뛰어난 연출력에 힘입어 ‘샘플링·컷업·리믹스’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법을 극한까지 추구한 작품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업계의 보수성으로 20대가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감독으로 주목받는 일은 아직 없지만 ‘실력’이 전부인 전자오락업계로 들어서면 사정은 달라진다. 20대의 거장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 주자는 (주)워프의 사장인 이이노 겐지(飯田賢治·26). 초등학생 시절부터 전자오락 같은 뉴 웨이브 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포스트 신인류세대의 창작자다. 작품 ‘D의 식탁’은 인터렉티브(interactive) 영화의 방향성을 제시한 작품이란 호평과 함께 게임으로는 처음으로 ‘멀티미디어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두번째 작품 ‘에너미 제로’는 TV브라운관에 소설을 띄우겠다는 이이노의 의지가 투영된 영상미학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까지가 시각(視覺)세대의 빛·장점이라면 어두움·단점은 뭘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감각장애와 영상매체 페티시즘이다. 페티시즘. 여성의 팬티나 스타킹등을 수집하는 것처럼 신체의 일부나 물건에 집착하는 성도착행위를 말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사진이나 비디오등 영상매체를 이용한 페티시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페티시즘의 가장 뚜렷한 특질은 집착의 대상을 특정한 부분에 한정시키는 것이다. 특히 영상을 이용한 페티시즘은 인간 신체의 부분화를 급속히 진행시키고 있다. 다리만을 모아놓은 사진집,입술만을 찍은 비디오가 버젓이 성인출판물 코너에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페티시즘 홈페이지가 등장했다. 여성의 발바닥 사진만을 수십장 모아놓은 홈페이지에서는 등골이 서늘한 광기가 느껴질 정도다.

살아있는 생물을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다는 인식은 그것의 재생도 가능하다는 착각을 준다. 재생할 수 있다는 착각은 파괴적 공격행위의 충동을 유발하게 마련이다. 오리에게 화살을 쏘고 토끼에게 에어건을 발사하며 고층빌딩에서 고양이를 집어 던지는 사건들의 배경에는 이러한 충동이 숨어 있다. 나아가 고베(神戶)살인사건의 14세 소년처럼 쾌락을 위해 사람을 처형하는 극단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시각세대들이 ‘감성적 지성’을 잃지 않는다면 영상문화의 기수로 활약할 수 있지만 길을 잘못 들면 끝없는 파괴성이 숨어 있는 페티시즘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는 것을 일본 사회는 극명히 보여 주고 있다.

김지룡 <문화경제평론가>

<약력>

·64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 박사과정중

·'비상구 없는 일본의 에로스'출간(97년)

·본지 '김지룡의 일본속으로'연재(97년 7∼8월)

·현재 문화경제평론가로 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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