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구로·가리봉 디지털단지 이곳엔 빛이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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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지털단지에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활기찬 발걸음으로 출근하고 있다. [안성식 기자]

 서울디지털단지에서 USB 메모리를 생산하는 메모렛월드 최백수(33) 사장. 그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하고 상경해 용산전자상가에서 ‘배달맨’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컴퓨터 유통업체를 차렸다가 2007년 3월 제조업체인 메모렛월드를 설립했다. 지난해 192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목표는 600억원이다. 직원도 지난해 26명에서 올해 41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그는 “미국과 유럽·일본 등 선진국까지 메모렛월드 제품을 깔아 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10년 전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데 공이 컸던 벤처기업이 또다시 한국 경제의 희망이 되고 있다. 외환위기 때는 서울 강남 테헤란밸리였으나 이번에는 옛 구로·가리봉공단의 서울디지털단지다. 정책적으로 이곳을 벤처기업의 산실로 키운 데다 임대료 등이 싸 창업의 꿈이 있는 젊은이가 많이 몰렸다. 서울디지털단지 내 종사자는 1999년 2만9000여 명이었으나 올 1월 기준 10만9000여 명으로 크게 늘었다. 입주 기업도 99년 597개에서 8604개(지난해 말 기준)로 증가했다. 역삼동에 있던 한국벤처기업협회도 아예 이곳으로 옮겼다.

◆희망이 싹튼다=인터넷 호텔 예약시스템 ‘호텔엔조이’를 개발한 메이트아이 강경원(40) 사장은 올해 환율 덕을 톡톡히 봤다. 일본과 중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가격 비교까지 가능한 호텔엔조이 접속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43억원의 수수료 매출을 올린 강 사장은 올해 60억원의 매출을 기대한다. 직원도 지난해 30명에서 올해 50명으로 늘렸다. 강 사장은 “한국의 익스페디아(매출 2조원을 올리는 미국의 인터넷 예약 사이트)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모토로라코리아에 근무하던 박세진(40) 사장은 2005년 4월 모바일 UCC(사용자 제작 콘텐트) 업체인 엠투미를 창업했다. 휴대전화로 음식점 등의 사진을 찍어 곧바로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띄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엠투미가 5명의 직원과 함께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블로그 주소만 입력해 놓으면 네이버나 다음으로 전송돼 계속 업데이트할 수 있다. 한국시설안전공단에 재난 영상 전송 소프트웨어로 납품하기도 했다.


서울디지털단지에 입주한 휴먼메디텍 고중석(55) 대표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스위스 의료기기 업체인 벨리메드에 약속한 의료용 저온 플라스마 멸균기를 공급하는 일이 밀려서다. 휴먼메디텍은 지난해 6월 벨리메드에 2011년까지 5000만 달러 상당의 멸균기를 공급하고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도 공동으로 추진하는 계약을 했다. 이 회사의 멸균기는 섭씨 50도 이하에서 40분 이내로 멸균돼 의료기기 변형과 파손 없이 단시간 내 소독이 가능하다. 전 세계에서 존슨앤드존슨과 휴먼메디텍만 생산할 수 있다. 의류업체 경영인으로 활동하다 40대 중반에 창업한 고 대표는 “세상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과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이 중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밤샘 작업’은 옛말=94년 이전의 1세대 벤처, 99년까지 벤처 열풍을 불러일으킨 2세대 벤처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밤샘’이었다. 아이디어를 제품화하고, 이를 통해 투자받으려는 벤처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개발에 전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디지털단지에 입주해 있는 3세대 벤처들에게 밤샘은 흔치 않다.

액션게임 ‘윈드슬레이어’를 개발한 게임 스튜디오 하멜린의 강대성 대표는 “정해진 시간 내에 집중력을 발휘해 업무를 진행하는 게 생산성 향상에 유리해 밤샘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윈드슬레이어는 야후게임즈에서 동시 접속자 수 3000∼4000명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벤처기업협회 전대열 상근부회장은 “지금까지 벤처로 확인받은 기업 중 매출 기준으로 ‘1000억원 벤처클럽’에 68개사, ‘3000억 벤처클럽’에 6개사가 가입했다”며 “3세대 벤처인들은 경기 침체 탈출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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