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대통령 김치’를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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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최태원(49) SK그룹 회장은 귀빈에게 계열사에서 만든 ‘수펙스 김치’를 가끔 선물한다.

“아버님의 뜻이 담긴 귀한 선물입니다.”

그는 지난해 8월 부친인 최종현 회장 타계 10주기 행사 때 초청된 1000여 명의 인사에게도 이 김치를 선물했다. 생전에 최종현 회장은 ‘육개장 회장님’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육개장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주로 찾은 곳은 쉐라톤 워커힐 호텔의 한식당 ‘온달’. 이 식당에서 일했던 이춘식 워커힐 조리팀장은 “회장님은 맛 감각이 뛰어나 우리가 고생을 많이 했다”며 “육개장과 함께 드시던 김치 맛이 계절마다 왜 이리 차이가 나느냐는 꾸중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참다 못한 최종현 회장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맛이 똑같은 최고의 김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1989년에 만들어진 것이 ‘워커힐 김치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워커힐 호텔 본관 1층과 2층(각각 82m²)에 있다.

13일 오전 10시에 찾은 2층 선별작업실에서는 직원 4명이 김치를 썰고 있었다. 호텔 만찬장에 내놓기 위해서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위생 코트와 위생 신발을 신고 에어샤워까지 해야 했다. 숙성실에는 25L 용량의 항아리 150여 개가 있다. 각 항아리에는 ‘090325F2’ 형식으로 스티커가 붙여졌다. 2009년 3월 25일에 숙성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F2는 만든 사람을 지칭한다. A~F조의 선임자순으로 1, 2, 3 번호를 쓴다. 배추는 전남 해남과 강원도 고랭지에서 고른다. 충북 음성 고추 등 최고급 재료만 쓴다.

고 최종현 회장(中)이 1990년대 초반 중국 석유총공사 임원들과 워커힐 호텔 한식당 에서 만찬하고 있다.

또 경기도 지방의 김치 맛을 기준으로 삼는다. 고 최종현 회장이 “매운 남도의 김치와 양념이 거의 없는 이북 지방의 김치보다는 한반도 중간 지역의 맛으로 만들면 외국인에게도 우리나라 김치의 표준으로 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치를 먹고 난 뒤 고춧가루가 이에 끼었나 봐요. 그래서 최종현 회장이 고춧가루를 파우더처럼 갈아서 사용하라고 해 그렇게 한 거죠.” 이선희 조리장의 설명이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수펙스 김치다. 수펙스(SUPEX)란 ‘Super Excellent Level’을 줄인 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SK그룹의 경영정신이다. 최종현 회장은 서울대 농화학과 출신으로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대에서 화학 공부를 할 때 김치 발효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춘식 조리팀장은 “회장님은 김치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있었다”며 “김치 개발을 한 지 5년 만에 ‘이젠 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연구비만 약 5억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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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연구소 에서 이춘식 조리팀장(左)과 이선희 조리장이 숙성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SK 제공]

아들인 최태원 회장은 지난달 5일 현장경영차 워커힐 호텔을 방문했을 때 김치연구소를 가장 먼저 들렀다. 그는 “한식이 세계화하기 위해선 기본이 되는 게 김치고, 선대 회장의 말처럼 세계 어느 곳에서 먹어도 일정한 맛이 나도록 표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펙스 김치는 남북 정상회담, 다보스 포럼 등 국내외 행사 만찬장에 단골로 나간다. 대통령 해외순방 때도 세 번에 한 번꼴로 동행해 ‘대통령 김치’로 불린다. 값은 ㎏당 2만원으로 일반 김치의 네 배 정도다. 지난해 6월에는 호텔업계 최초로 식품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HACCAP) 인증을 획득한 뒤 일반인에게도 팔기 시작했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4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 50억원어치를 국내외에 팔 계획이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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