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태국 경제위기 해소에 분주한 추안 리크파이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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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경제 파탄의 책임을 지고 11개월만에 물러난 차왈릿 융차이웃 전 총리의 뒤를 이어 지난달 16일 생애 두번째로 태국의 국정 (國政) 운영을 맡은 추안 리크파이 총리. 5천7백만 태국인의 장래를 떠맡은 그는 일찍부터 청렴하고 유능한 정치인으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이 때문에 청백리로 유명한 잠롱시장에 비견되기도 한다.

태국인들은 "국민들은 추안 총리를 존경하고 총리는 국민들을 사랑한다" 는 말로 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그의 총리 취임 소식이 전해진 뒤 주가가 반등하고 바트화 폭락세가 진정될 만큼 국민들의 기대감은 크다.

추안 총리와의 인터뷰를 위해 지난달 29일 처음 찾아갔던 방콕 남서쪽 멀링가의 그의 2층 슬레이트 주택은 한 나라의 총리가 사는 집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낡고 초라했다. 서민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위치한 그의 집은 지은지 10년이 넘어 페인트가 벗겨질 만큼 낡았고 담장 너머에는 판자 지붕의 구멍가게와 미장원이 붙어 있어 그의 검소한 생활을 짐작케 했다.

총리 자택의 주변에는 과일.생선.잡화등을 파는 6~7명의 행상들이 목청을 높여 장사를 하고 있었다.

삼엄한 경비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집 주위에 고작 서너명의 사복 경찰들만이 경비를 선다는 것이다.

추안 총리와의 인터뷰 성사과정은 그의 인품을 잘 말해준다.

추안 총리가 아태 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담을 마치고 29일 오전 귀국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는 사전 약속도 없이 직접 집을 찾아가 경호실장에게 총리 면담신청을 했다.

그러나 총리는 취임이후 경제회복 대책 마련과 IMF긴급자금 지원 요청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외국 언론과 일체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대답이었다.

기자와 통역이 29일 새벽부터 꼬박 7~8시간을 집 앞에 서서 기다린 것을 목격한 추안 총리는 빡빡한 일정을 쪼개 어렵사리 시간을 내주었다.

그는 두 가지 조건을 달아 인터뷰를 승낙했다.

하나는 집이 너무 좁고 지저분하기 때문에 인터뷰 장소를 민주당 당사로 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APEC 정상회담을 마치고 그날 오전에야 귀국했기 때문에 다음날인 30일 저녁에 시간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추안 총리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밤 7시 (현지시간) 부터 1시간30분가량 민주당 당사의 당수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앞으로의 국정운영 방향과 관련, "오늘날 태국 경제의 총체적 위기는 투명치 못한 정책에서 시작됐다" 며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국민들의 단결과 협조를 구하겠다" 고 밝혔다.

그는 이날 "외국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는 한국의 중앙일보가 처음" 이라며 "태국과 비슷한 경제위기를 겪는 한국인들에게 태국의 현실을 부디 똑바로 전해달라" 고 거듭 당부했다.

- 바쁘고 피곤하실 터인데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살고 계신 집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총리관저를 두고 구태여 좁은 집에서 살고 계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거추장스런 겉치레를 원래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가난한 정치가입니다.

집을 장만할 돈이 없어요. 집이 좁아 손님들을 대하기가 불편해 은행 대출을 받아 현재 조그마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에는 총리관저를 이용합니다."

- 지난번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때 한국의 김영삼대통령과 어떤 말씀들을 나누셨습니까.

"양국의 경제 현안이 같아 회의도중 시간이 날 때마다 개인적으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나는 한국의 상황에 대해 물었고 김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대통령이 나에게 IMF에서 돈을 얼마나 빌릴 것이냐고 묻기에 1백72억달러라고 답했더니 김대통령은 한국은 경제규모가 커 2백억달러를 빌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앞으로 좋은 결실이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 80년대이후 고속성장을 계속했던 태국 경제가 무엇 때문에 IMF의 긴급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될 정도의 위기에 빠졌다고 보십니까.

"정부와 국민들 모두 경제 운용에 있어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민간기업들은 국내외 금융기관에서 지나치게 돈을 많이 빌렸습니다.

정부는 보유 외화를 가지고 바트화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했다고 봅니다.

또 사태 대응에 나선 정치가들도 고비때마다 실기 (失機) 를 거듭했으며 경제상황을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 그렇다면 그같은 문제들을 극복하고 다시 경제를 성장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총리께서는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펴 나갈 계획이십니까.

"투명한 정책과 깨끗한 행정만이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해야만 합니다.

공개행정을 바탕으로 모든 문제를 가식없이 해결해야 합니다.

여기에 개개인의 사심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맞다고 판단되는 것은 당리당략에 치우치지 말고 과감히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 한국에서는 IMF 지원조건 때문에 말이 많았습니다.

IMF가 제시하는 요구조건을 총리께서는 모두 수용하실 것입니까.

"태국 정부는 경제위기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IMF의 요구조건을 피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일 계획입니다.

태국 경제는 최근 수출 악화와 바트화의 신용도 추락이라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경제정책을 구사하는데 있어 힘을 잃더라도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국민들도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태국은 IMF에 1백72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며 일부를 이미 지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더 많은 구제금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총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부 언론에서 그런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현재로선 IMF에 추가지원 요청을 생각치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금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가서 다시 검토할 작정입니다."

- 한국 정부는 정확한 외화보유액을 밝히지 않아 불안감을 높인 측면이 있습니다.

태국의 외화보유액을 밝힐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과거 충분한 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바트화 가치를 방어하는데 엄청난 달러를 풀었기 때문에 보유 수위가 크게 낮아졌습니다.

지금 정확한 규모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국민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적은 수준입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아직까지 외국투자자들의 불안이 멈추지 않고 있어 보유외화가 점점 더 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융기관의 돈이 바닥나 경제현장은 물론 금융기관끼리도 돈이 돌지 않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대출이 끊긴 것이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 IMF 지원조건을 수행하려면 경제의 긴축운용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실업과 물가상승이 큰 문제가 됩니다.

일부에서는 태국 경제가 내년에 최악의 상태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풀어가실 것입니까.

"기업들이 운전자금 부족으로 조업을 중단하거나 심할 경우 문을 닫고 있어 실업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봅니다.

물가상승으로 쌀을 비롯한 생필품 구매도 눈에 띄게 줄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실업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정부는 노동사회복지부를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으로 실업자들이 고향인 농촌으로 돌아가 농업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정책지원을 하려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농업국가인 태국은 공업국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한국보다 실업사태 해결이 다소 쉬운 편입니다.

태국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어 도시 근로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얼마든지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습니다."

- 태국 경제를 다시 정상 궤도로 올려 놓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십니까.

"정치 안정과 새 경제팀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현재 상황을 감안할 때 2~3년은 소요될 것으로 봅니다."

-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계기로 아시아 경제의 성장 신화 (神話) 는 끝났다고 보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총리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재도약을 확신합니다.

현재의 위기는 해당 국가의 정부와 국민들이 자신의 위치를 잠시 망각해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고속성장에 도취해 자신의 참된 위치를 혼동했던 것입니다.

재도약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근검절약입니다.

낭비하는 국민이 많으면 지속적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태국과 한국은 국민성이 근면하고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리라고 확신합니다."

- 아시아국가들은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협력관계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들이 많습니다.

주변국들과 어떻게 협력해 나갈 방침이십니까. "물론 협력은 중요합니다.

특히 APEC을 통한 범아시아 차원의 문제해결 방식이 주효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아시아 국가들이 위기를 빠져나가는 길은 각국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사실 아시아 각국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내문제들이 많아 남을 도울 여력이 없습니다.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바라기보다 국민들이 하나로 뭉쳐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봅니다."

- 태국 정부는 이미 부실 금융회사에 대한 정리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향후 구체적인 일정이 잡혀 있습니까.

"이미 58개 부실 금융회사의 영업을 정지시켰으며 곧 추가적인 금융기업 구조조정안을 발표할 것입니다.

일단 정해진 기준은 예외 없이 원리원칙에 따라 실행될 것이고 특히 금융산업 개편과정에서 정치권의 개입을 철저히 막을 생각입니다."

- 정치가로서의 좌우명을 말씀해 주십시오. "국민의 필요에 의해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28년간 정치를 해오면서 나는 항상 국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경계해 왔습니다.

어떤 힘도, 어떤 부 (富) 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살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였고 어머니는 지금도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팔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

- 한국은 지금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평소 추구하는 훌륭한 지도자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치가가 지녀야 할 첫번째 덕목은 정직과 성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지식과 문제해결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지도자에게 정직과 성실이 없으면 국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정치가로서 이런 요건들을 두루 갖추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통역=盧承煥 삼성전기현지법인 과장

[약력]

▶38년 남부 트랑주 (州)에서 출생 (59세)

▶포창예술학교.실파콘대학 예비미술학교에서 미술 공부

▶탐마셋대 졸업 (법학 전공) 뒤 변호사로 활동

▶69년 민주당 입당, 트랑주에서 최연소 하원의원 당선

▶74년 법무차관

▶76년 총리실장관

▶80~85년 법무.상무.농무.교육부장관

▶86~88년 하원의장

▶88년 보건부장관.부총리

▶91년 민주당 당수

▶92년9월 5개 정당의 연정 (聯政) 총리로 취임

▶95년7월 총선 패배로 실각

▶97년11월 7개 정당의 연정 총리로 두번째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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