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 머리 한 번 다듬고 60만원 … 이런 고부가 산업 또 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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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24면

서울 청담동 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인 시범을 보이고 있는 이가자 원장. 그는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열성파 경영인이다.

1942년생이니까 올해 우리 나이로 예순여덟. 그런데도 허리가 꼿꼿하고 목소리는 명징하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도록 아이섀도를 발랐는데, 이런 스타일을 40년 넘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지켜왔단다. 미용업계의 대모(代母) 이가자 원장은 지금도 현장에서 펄펄 나는 ‘현역’이다. 현역도 보통 현역이 아니다. 중국에서 홀수 달, 한국에서 짝수 달을 보내고 중간에 호주·미국 사업까지 챙기는 ‘글로벌 현역’이다. 기자가 인터뷰하던 4시간 내내 그는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중국 차 ‘동방미인’을 세 잔 마신 게 고작이었다. “건강 나이로 치자면 40대로 보인다”고 인사하자 이 원장은 “하루 10시간씩 서서 일한다. 일이 보약”이라며 받아 넘겼다.

‘51년째 현역’ 이가자 이가자헤어비스 원장

-‘조금 유명한’ 미용실 브랜드인줄 알았는데 ‘이가자 파워’가 만만치 않다.
“(웃으면서) 국내 85곳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130여 미용 네트워크가 있다. 호주에서 96년부터 ‘LKJ컬리지’라는 미용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엔 97년 진출했다. 중국에 나간 건 2002년이다. 천안문·자금성이 걸어서 5분 거리인 베이징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중국 최고 명사들이 모이는 ‘호랑이굴’ 같은 곳이다. 호랑이 잡으러 갔으면 당연히 그래야지! 최고 요지에 터를 잡은 덕분에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졌고, 지금 중국 전역에 이가자가 32곳이나 된다.”

이 원장은 “‘베이징 이가자’는 미용실과 피부관리실, 교육센터를 포함해 방이 네 개나 된다”고 자랑했다. 이어 “퍼머·화장 비용이 평균 3000위안(약 58만원)”이라고 말했다. 하루 10명만 찾아도 현상 유지가 가능하단다.

-머리 다듬는데 3000위안은 너무 비싸다.
“2002년 개업 때부터 그렇게 받았다. 중국 최고위층 부자가 주고객이다. 이런 고부가·무공해 산업이 미용 말고 또 있나? 중국 이가자는 비달사순, 토니앤가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품 헤어관리 브랜드로 통한다. 서울에서도 청담동에선 평균 25만원, 비싸면 50만원쯤 받는다.”

이 원장이 미용과 인연을 맺은 것은 50년이 넘는다. 경기도 용인에서 동네 미용실을 운영하던 어머니를 대신해 여고생이던 이 원장이 미용사 면허증을 딴 것이 계기가 됐다. 이때가 58년이다. 이후 서울 청파동에서 작은 미용실을 운영하다 서교동으로 옮겨 ‘이가자’라는 간판을 단 게 72년이다. 90년대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선 그는 미국·중국·호주에도 진출했다. 결국 ‘효도 자격증’ 하나가 글로벌 미용인을 만든 셈이다.

-어떻게 이름을 브랜드로 쓸 생각을 했나.
“그래야만 명동 미용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것 같았다. 당시 명동엔 ‘센추리’ ‘꾀꼬리’ ‘꽃샘’ 같은 유명 미용실이 있었는데 이들과 차별화하는 방법으로 이름을 내건 것이다. 처음엔 정말 민망했다. ‘속옷 바람’으로 외출한 심정이라고 할까.”

이 원장에게 “이름이 조금 독특하다”고 물었다. 이 원장은 크게 웃으며 “맞다. 그런데 선견지명이 있는 이름”이라며 무릎을 쳤다. “아버지께서 지어준 이름인데 워낙 창피해서 어릴 때는 그냥 ‘숙이’로 지냈다. 그러다 중학생 때부터 가자라는 이름을 썼는데, 중국에 가니까 ‘아름다울 가(嘉)’ 자는 돈 주고도 못 사는 좋은 이름이 되더라. (웃으며) 아버지께 고마울 따름이다.”

-처음부터 명동서 영업할 생각은 안 했나.
“무서워서, 간이 떨려서 못 갔다. 그래도 ‘호랑이굴’은 조사했다. 자세히 보니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명동 미용실 주인은 ‘다방 마담’ 같더라. 버선 바람으로 나와서 ‘순이야’라며 미용사를 부르는 것이 왠지 구시대적이었다. 이때 ‘미용의 역사를 마포에서 새로 쓰겠다’고 다짐했다.”

이가자가 명성을 얻어가면서 80년대 이후 서교동은 ‘미용의 메카’로 떠오른다. 황신혜·원미경·김미숙 등 당대의 스타들이 다녀가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단골이 되면서 “부인이 이가자에 다니지 않으면 장관이 될 수 없다”는 우스개도 퍼졌다.

-성공한 비결은 무엇인가.
“어린 시절 별명이 ‘찡찡이’였다. 하도 욕심이 많아 중간에 일이 틀어지면 찡찡거리면서라도 반드시 이뤄내야 직성이 풀렸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먼저 카운터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손님이 계산할 때면 얼굴이 붉어져서 화장실로 숨은 적도 많았다. 일이 좋았던 것이지, 돈을 바랐던 게 아니다. 카운터에 앉아서 계산기 두드리기보다 그 시간에 손님 머리 만지는 게 백 번 낫다. 그리고 미용사를 ‘순이야’에서 ‘김순이 선생님’으로 바꿔 불렀다. 호칭 격상이다. 본인에게는 자긍심, 손님에게는 존경심을 유발하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여기가 무슨 학교냐’며 놀렸지만 이내 ‘선생님’으로 호칭이 통일되더라. 인센티브도 과감하게 줬다. 80년대 초반 강남에 ‘이가자 2호점’을 낼 때 20대 초반 ‘선생님’을 과감하게 기용했는데, 당시 선생님도 자가용을 굴렸다.”

-가맹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그게 아이러니한데…. 우루과이라운드(UR) 영향이 크다. 개방 바람을 타고 UR이 타결되자 프랑스의 한 헤어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온다며 우리와 손을 잡자고 했다. 처음엔 동의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외국 브랜드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맞대응을 하기로 한 것이고, 그것이 업계 최초의 프랜차이즈 사업이 됐다.”

-해외 진출을 한 배경은.
“(크게 웃으며) 그게 나도 궁금하다. 나는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손등을 목으로 가져가며) 숨이 턱 막혀서…. 그래서 나는 괴물이다. 그런데 이게 ‘한국인의 힘’ 아니었나? 일단 도전하는 것이다.”

-은퇴 계획은.
“은퇴라고? 입을 옷이 너무 많아서 아직 그럴 계획은 없다. 지금도 40년 전에 산 ‘이태원 실크’ 옷을 입고 다닌다. 나는 머리카락 냄새 맡을 때 희열을 느낀다. 광기(狂氣)가 나! 오히려 10년 뒤에는 존재감이 더 커져 있을 것 같다. 여든 돼서 허연 머리가 수북해지면 나는 보석이 될 거다.”

-좋은 헤어 스타일은.
“결론부터 말하면 소통이다. 이 세상에 ‘마술 손’은 없다. 손님이 어떤 생각으로 미용실에 오는지, 기분은 어떤지, 머리를 왜 바꾸려는지 등등을 살펴야 한다. 대화를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카운슬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용사는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동시에 갖춘 ‘명품 직업’이다. 실력만 있으면 평생, 전 세계 어디를 가도 프라이드를 누릴 수 있다. 의사·변호사 안 부러운 직업이다, 이 얘기는 꼭 써 달라.”



WHO?
1942년 경기도 용인생. 72년 서울 서교동에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이가자미용실’을 열었다. 당시로선 이름을 브랜드로 내걸고 장사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후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고 미국·중국·호주 등 해외 진출에 나서 세계적으로 130여 이가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최근 건국대 교육대학원에 미용교사 석사 과정을, 명지전문대에 미용학과를 운영하는 등 교육 사업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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