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길 걸으며 선업 스님에게 ‘연애’를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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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스님들에게 ‘연애’는 ‘깨달음을 방해하는 요물’이다. 그런 연애와 17년간 함께한 스님이 있다. 바로 삼청동에 있는 ‘행복치유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선업 스님이다. 문패도 없는 상담소에서 시작된 ‘연인’들의 이야기는 북촌 한옥 길을 산책하면서 ‘인연’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났다. 취재_지희진(객원기자) 사진_김현주(studio lamp)

금기 깨고 17년간 연애 상담 중, 다시 찾아오는 봄처럼 쉼 없이 사랑하세요

봄볕이 따스하던 날, 아침 일찍부터 선업 스님(44)이 운영하는 삼청동의 ‘행복치유센터’를 찾았다. 문 앞에 들어서자마자 스님이 온화한 미소로 맞이했다. 여느 가정집처럼 아늑해 상담소보다는 사랑방이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방 한쪽 볕이 잘 드는 곳에는 다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말하고, 아파하다 돌아갔을 터. 선업 스님은 이곳에 머물면서 ‘연(緣)’ 상담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6년 동안은 불교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살며 생각하며’에서 ‘선업 스님의 연애 상담소’라는 코너를 맡아 청취자들의 연애 고민을 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천안 광덕사의 교육국장으로 지내면서 ‘첫 만남 교실’, ‘부부교실’ 등을 열어 예비 부부들과 만나고 있다.

사랑을 앓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다

상담소를 찾아온 사람들은 스님에게 연애 상담을 하는 것을 무척 낯설어한다. 주뼛거리며 들어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만 하다가, 30분 정도 지나서야 상담소를 찾아온 이유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스님의 입에서 사랑, 연애, 불륜 등과 같은 말들이 나오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연애도 사랑도 모두 사람과의 관계, 인연으로 이뤄지는 거잖아요. 불교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緣)’이니, 스님이 연애 상담을 한다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스님들까지 저를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수행자가 연애를 말하다 보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죠.”

‘연애 상담가’라는 스님의 특이한 이력이 시작된 것은 1992년 군승으로 복무하면서부터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스님을 부르더니 아무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여자친구가 떠나갔다며 한참 동안 펑펑 울었단다. 스님은 청년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라고 위로를 건넸고, 그 후부터는 사병들이 하나 둘씩 스님을 찾아왔다. 겉으로는 씩씩해 보이는 남자들이었지만, 모두들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다. 그렇게 연애 상담을 시작한 것이 벌써 17년이나 됐다. 이제는 근심 어린 얼굴로 찾아왔던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문을 나설 때면 스님 역시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란다.

이쯤 되면 연애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을 법도 한데, 스님은 “내가 하는 일은 가만히 들어주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한 번 시작한 사람들은 2시간이 넘게 고민을 말하는데, 그때 스님은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가끔씩 고민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사람들은 생각하던 것을 말하면서 자신의 고민을 스스로 정리하고,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데, 그 순간 마음의 변화는 시작된다. 스님은 이를 ‘아하 반응’이라 부르는데, 이런 아하 반응을 경험하면 예전의 고민을 대하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고 했다.

“전 항상 상담할 때 제 방에 놓인 오래된 거울에 대해 말해요. ‘거울처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조언하죠.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비치듯 결국 해답은 자신 안에 있어요. 연인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좋아졌다면 부정하지 말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스님은 “어린 학생들부터 대학생 커플, 나이 지긋한 부부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들 연애에 대한 고민을 안고 찾아오지만, 알고 보면 원인은 하나”라고 말한다. 바로 자신과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어느 날 스님을 찾아온 한 부부는 외도나 폭력 등의 심각한 이유가 아닌데도 이혼을 하려고 했다. 성격이 맞지 않아 이제는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하겠다는 것.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상대방이 나한테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 번 떠올려보라”고 권했다.

“아내는 ‘내가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무릎을 꿇고 있다’고 했고, 남편은 ‘아내가 내 한쪽 어깨에 올라타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동안 아내는 자신이 모든 걸 양보하고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남편은 아내가 주는 부담 때문에 허덕이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한집에 살면서 너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두 사람 모두 놀라는 눈
치였어요.”

목욕탕에서 부부 관계 상담했던 사연까지…

결혼을 앞두고 헤어지려는 커플이 스님을 찾아오기도 했다. 남자는 작가인 여자친구가 매일 야근하고, 자신보다 일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여자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되물었다.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 두 사람은 숨겨뒀던 서운한 마음까지 얘기했고 그 자리에서 크게 싸우기는 했지만,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 스님은 “잘살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며 웃어 보였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상담소를 다녀간 사람들이 벌써 열 명이 넘어요. 연애 때문에 속 타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은 거죠. 요즘 막장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사람들의 실제 삶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은 드라마보다 더 많이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어요.”

스님은 3년 전부터 가정법원에서 이혼 상담을 해오고 있는데, 요즘들어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들이 많이 늘었단다. 경기 불황 탓인지 이혼 사유가 대부분 경제적인 문제인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스님은 ‘힘들 때일수록 곁에서 위로해 주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다. 현실에서는 그렇게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연애 상담을 해왔지만, 이렇듯 스님에게 ‘연애’란 아리송한 문제였다. 가족치료학을 전공했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아 전문성도 갖췄지만, 연애 상담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진단다.

때로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스님이 대중목욕탕을 찾으면 목욕탕은 어느새 상담소가 됐다. 목욕탕에 있던 사람들은 스님에게 물 한 잔씩을 건네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부부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많았다. 그때는 수행자 입장에서는 어려운 시간이지만, 결혼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인 만큼 스님은 조심스럽게 부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단다. 그 후 스님은 ‘첫 만남 교실’에 올바른 부부 관계에 대한 수업을 마련해 예비 부부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연애 상담하며 수양하는 스님과 사랑을 이야기하다

“집 장만이다, 혼수다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싸우고, 헤어지는 커플이 많아요. 결혼 자체가 목적이 돼버렸기 때문이죠. 결혼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살아가는 게 목적이 돼야 해요. 불교에서 부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 노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요.”

스님은 하루에 두 사람 이상 상담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고민을 모두 소화시켜야만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전과 오후에 한 사람씩 만나고, 그 사이에는 명상을 하거나 산책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스님을 찾은 사람들은 당장 고민을 떨쳐버릴 해결책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을 얻어간다. 그런데 스님 역시 얻는 게 있다고 말했다. 매일 사람들을 만나 상담을 하면서 갇혀 있던 자신의 생각을 깨는 기회를 얻는 것. 스님은 수행의 의미로 매일 아침에 일어나 뒷머리를 가만히 만지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전날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밀어도 다음 날 만져보면 까슬까슬하게 올라와 있어요. 이렇게 잘라낸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듯 살다 보면 힘든 일들이 끊임없이 생겨요. 연애를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과 미움, 질투라는 감정이 계속 자라나게 되겠죠. 하지만 머리카락이 나듯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걸 알면, 어떤 일이 닥쳐도 지금만큼 아프지 않을 거예요.”

상담소를 나와 스님과 함께 천천히 한옥 길을 걷다 보니 겨울을 나느라 바싹 말라버린 담쟁이덩굴이 눈에 띄었다. ‘이제 봄이 되면 다시 파릇하니 피어나겠죠?’ 기자의 질문에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더 따뜻해지면 다시 푸른 잎들이 무성하게 자라 담을 덮겠죠. 사랑이나 연애처럼요. 높은 벽을 천천히 오르는 담쟁이 넝쿨처럼 사랑도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결국엔 꼭대기에 오르게 되잖아요. 마른 담쟁이 넝쿨에 봄이 찾아오듯 이별한 사람에게도 사랑은 또 다시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 평생 쉼 없이 사랑하세요. 연애도 사람이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과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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