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의 필름 앤 필링]단편영화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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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장 뤽 고다르, 마틴 스코세지, 빔 벤더스. 현대의 영화 작가로 꼽히는 이들의 공통점은 장편 극영화 데뷔 이후에도 간간이 단편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고다르는 '스케치 영화' 라는 이름으로 '미래, 전망 또는 2000년' (67년) 등의 단편을 내놓았고, 스코세지 역시 '이탈리안 아메리칸' (74년) 등 여러 편의 장편영화 사이사이에 단편을 선보였다.

벤더스 또한 짧은 분량의 기록영화와 단편을 부지런히 찍은 감독으로 유명하다.

넓은 의미로 보면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도 단편형식을 빌린 영화다.

여하튼 내로라 할 당대의 감독들이 이렇듯 단편 영화에 깊은 관심을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장편이 갖는 상업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창작욕을 좀더 분방한 양식으로 실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컨대 그들에게 단편영화는 휴식이면서 반성이고 또 모색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단편은 장편과 다른 양식이다.

60분 이내라는 짧은 시간은 단편영화에 상대적 자율성을 안겨준다.

대자본의 투입에 따른 흥행의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연히 관습적인 문법과 규제로부터 벗어나 표현의 극한을 추구할 여지가 확보되는 것이다.

그 어떤 몽롱함과 음침함마저도 용인되는 매체란 얼마나 유혹적인가.

그래서 많은 예술 이단아들은 날렵한 단편의 몸을 빌어 세상을 조롱하고, 영화를 상처내고, 관객을 오래도록 멍들게 하지 않았나. 그런 의미에서 단편영화의 궤적이 아방가르드 실험영화의 역사와 근친간인 것은 필연이다.

요컨대 단편은 새로운 감성과 인식의 수혈을 가능케하는, 과격하게 말해 도발이며 온건하게 말해서 풍요로운 영화적 방계 (傍系) 다.

우리 사정은 어떤가.

여균동 감독의 '외투' 나,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전수일 감독의 '시간' 연작 외에는 현역 감독이 단편에 매달린 예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원인을 큰 스케일에 대한 경사 (傾斜) 랄지 제작비 마련에 따른 어려움.체면 따위에서 찾는 건 좀 단순한 분석일 것이다.

그보다는 데뷔한 다음 구태여 단편을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지적이 사실에 가깝다.

이런 현상을 우리 감독의 인식 부족 탓으로만 몰고갈 생각은 없다.

두가지 이유에서. 즉 우리 사회에서 단편 영화가 갖는 사회적 위상, 그리고 영화 매체를 대하는 사회 전반의 태도와 연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지금 단편 영화는 누가 만들고 있는가.

영화를 전공한 대학생, 영화에 뜻을 둔 젊은이, 그리고 인디펜던트 혹은 실험을 표방하는 영화집단. 성과는 솔직히 미미한 편이다.

영화제 수상작의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졸업용 습작 수준이다.

통제력을 상실한 무방비 상태와 실험성과 뒤섞인 아마추어리즘이 작품 내부를 설렁설렁 배회하는 것 투성이다.

아니면 장편을 향한 얄팍한 도하용 (渡河用) 이거나. 이런 형편의 한켠에 단편을 이용하는 상혼도 있으니. 하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단편영화는 활성화해야 한다.

이 몰골을 흉보기엔 여건이 너무 참담하다.

제작기금 (펀드) 지원도 없고, 아직도 심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흔히 하는 말로 갖은 민폐를 끼쳐가며 만들어도 보여줄 공간이 없는데 무슨 발전을 기대하겠는가.

가장 발랄한 영화의 공기, 제일 빠른 감각의 유격전사, 지치지 않는 항체인 단편이 이렇게 허우적대는 한 우리 영화에 빛은 없다.

김정룡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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