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집권후 미국과 '으르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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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와 미국의 반목은 무아마르 카다피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1969년에 시작됐다. 1인 독재체제를 굳힌 카다피는 국명 리비아를 '대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로 개칭하고 반미.반유대인 운동과 전 세계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73년 중동전쟁 때 리비아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했으며,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좌익 게릴라, 북아일랜드공화군(IRA), 스페인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인 자유조국 바스크(ETA), 필리핀 모로이슬람해방전선 등 주요 무장단체들을 지지했다. 70년대 말 리비아는 일본 적군파에서부터 예멘 사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무장단체들에 훈련캠프를 제공했다.

카다피는 81년 출범한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에서 발생한 양국의 군사충돌을 계기로 레이건은 리비아 내 자국민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곧바로 리비아와의 단교를 선언했다. 82년엔 리비아 석유에 대한 금수조치도 내렸다.

카다피가 서방사회의 공적(公敵)이 된 결정적 계기는 84년 런던 주재 리비아 대사관에서 날아온 총탄에 영국 여성경찰관이 사망한 사건과 86년 서베를린 디스코텍 폭파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터키인 한명과 미국인 두명이 숨졌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이를 리비아의 소행으로 결론짓고 카다피의 가족들이 머무는 집을 폭격했다.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이 카다피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부른 것도 이 무렵이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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