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금융 실명제 찬방양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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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치권과 재계가 경제위기 타개책의 하나로 금융실명제 폐지 혹은 대폭 보완을 요구하고 나서 불가 입장의 정부와 뜨거운 공방을 벌이고 있다.

금융실명제의 고삐를 늦춰 지하자금을 양성화하는게 급하다는 주장에, 경제위기의 직접원인도 아닌 금융실명제 폐지가 처방일 수 없다는 반론이 맞서있다.

◇찬성[안종범 서울 시립대 교수·경제학]=현재 경제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조치가 강구되고 있다.

그러나 실명제 만큼은 그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경제위기의 책임을 현정권이 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실명제까지 실패작으로 매도해서도 안된다.

실명제를 유보하거나 폐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실명제 유보는 과거와 같이 가명거래를 법적으로 허용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가명, 심지어 123과 같은 숫자로 계좌를 개설한 뒤 이를 완벽한 자금세탁 수단으로 삼던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 역시 채권시장에서 가명거래를 허용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발행 당시 무기명이면 유통단계에서도 당연히 가명으로 거래되고 이는 자금세탁용으로 활용되기에 적격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금융개혁을 통한 금융시장의 정상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무기명 장기채권을 발행하거나 실명제를 유보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금융거래를 기초로 금융개혁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왜 실명제가 재계나 정치권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는것은 실명제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거래때 실명을 사용한다는 의미를 가질 뿐인 실명제가 어떻게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고, 완화내지 유보를 통해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문제의 본질은 실명제 자체보다 실명제가 계기가 돼 과거의 탈세와 같은 비정상적인 행위가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있다.

특히 금융소득종합과세로 금융소득이 연간 4천만원을 초과하면 국세청에 통보됨으로써 모든 금융거래 정보를 과세당국이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이 불안감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합과세 대상이 될 정도로 금융소득이 많지 않은 사람들도 종합과세가 되면 세금부담이 커질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사실 연간 약 6천만원까지는 과거 분리과세할 때보다 오히려 세부담이 줄어든다는 점을 아는 국민이 많지 않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선 실명제보다 조세제도와 행정을 손질해야 한다.

불안감의 원인은 바로 세금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높은 세부담을 지우는 세법으로 탈세할 수밖에 없도록 한 뒤 이를 빌미로 끊임없이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세제이자 세정이다.

따라서 세금을 떳떳하게 낼 수 있도록 세율을 인하하는 등 합리적인 조세제도를 마련하고, 공평무사하고 과학적인 조세행정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실명제 보완보다 훨씬 중요하고 시급하다.

지하자금을 양성화해 산업자금화하기 위해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이 필요하다는 주장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전에 우선 양성화 대상이 되는 지하자금이 무엇이고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산업자금화할 수 있는 지하자금은 이른바 장롱 속에 숨어 있는 현금 뿐이다.

금융기관에 예탁해 놓은 자금으로 무기명 장기채권을 산다면 산업자금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금융기관에 예탁된 돈은 그것이 차명이나 도명으로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산업자금화된 것이다.

혹시 산업자금화할 수 있는 지하자금이 얼마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양성화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실명제 보완을 주장하고 있지 않나 짚어 볼 필요도 있다.

◇반대[김한응 한국금융연수원 부원장]= 자금과 외환, 그리고 주식시장은 서로 연결돼 있어 어떤 하나가 움직이면 그것은 다른 두개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주게 돼 있다.

환율이 올라가면서 주가가 폭락했고 그뒤를 이어 금리가 올라간 것이 요즘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특히 주가와 금리 사이엔 경기에 특별한 요인이 없는한 금리가 오르면 주가는 떨어지고 반대로 금리가 떨어지면 주가가 오르는 좀 더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관계에 비춰 지금의 금융위기를 어디서부터 접근하는 것이 전략적인가를 살펴본다.

먼저 환율을 안정시키면 외국 투자가가 주식을 투매하지 않을 것이므로 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가정 아래 환율을 전략적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전략은 실패로 끝나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앞당기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이 정책이 실패한 것은 고평가돼 있었던 환율을 지탱하기 위해 보유외환을 대량 소진했는데 이로인한 보유외환 대폭 감소는 우리 경제의 대외 신인도를 더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전략은 금리를 인하하는 방법을 통해 주가의 하락을 방지하고 환율은 주가의 안정 위에서 경상수지 동향에 따라 스스로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다.

지난번 정부가 이런 전략으로 임했다면 보유외환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고 환율은 올라갔을 것이므로 수출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했어도 동남아 제국으로부터의 영향 때문에 쉽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우나 지금처럼 급하게 증권시장이나 자금시장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금리를 인하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된다.

특히 그 금리인하 방법이 통화증발을 동반하지 않는 것이고, 또 자금시장의 유동성을 높이는 효과를 겸하고 있으면 더욱 좋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좋은 점만 갖고 있는 금리인하 방법이 금융실명제의 폐지다.

이 방법의 또다른 장점은 이것을 실천에 옮기는데 비용.시간.인력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통화량 증발을 동반하지 않으므로 인플레 위험이 전혀 없고, 숨어있어 움직이기 어려운 자금에 기동성을 주므로 자금시장이 그만큼 넓어지고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금리가 몇%포인트 떨어지긴 하겠지만 그 변동폭도 줄어들 것이므로 주가의 하락을 상당히 방지해 줄 것이다.

지난 26일 정부가 취한 증시안정대책은 통화증발 효과가 있고 이에 의해 동원될 수 있는 자금이 8조5천억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폐지를 통해 동원될 수 있는 자금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특히 부가가치세법상 특별한 취급을 받는 영세상공인들이 세제상 불이익이 두려워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이야기되는 자금까지를 고려한다면 그 효과는 대단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의 전면폐지가 어렵다면 현재 거론되고 있는 무기명 장기채권 발행이라도 허용해 숨통을 터줘야 한다.

지금처럼 급할 때엔 숨어 있는 자금을 끌어내는 조치를 과감히 취해야 한다.

주가를 적어도 현수준에서 안정시키는 것은 금융기관의 대출여력과 기업의 신용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경제는 깊은 병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이 방법도 시기가 늦어질수록 그 효과가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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