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MBC '복수혈전'…찌그러진 '어깨'들 풍자성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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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돈 좀 있으면 다야? 더럽게 건방지네"

올백머리 손창민과 갈래머리 김혜수. 코가 거의 닿을 듯 얼굴을 맞대고 한판 붙을 기세에서 그만 돌아서고 만다.

김혜수를 잡아끄는 것은 단발머리 오연수. '축 이춘삼 대표이사 취임' 플래카드가 걸린 널찍한 연회장을 가로질러 저만치 목에 깁스붕대를 감은 허준호가 모니터에 잡힌다.

"컷! 자, 옮겨서. " 여기는 다음달 1일부터 방송될 MBC새 미니시리즈 '복수혈전' 에서 조직폭력배 춘삼 (김병기 분) 의 '쥬신호텔' 장악을 축하하는 연회장면 촬영이 한창인 서울광장동 워커힐호텔. 평소에도 샹들리에조명이 근사한 곳이라서인지 화려한 연기자들이 조금도 낯설지 않다.

담배 한대 피워물고 연회장밖에서 해바라기하는 안재욱, '공주드레스' 에 왕관까지 쓴 양희경과 무언가 정담을 나누는 건달차림의 권해효. 촬영이 중단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이어지는 스틸사진촬영에는 까무잡잡한 가슴이 반쯤 드러나는 차림의 임상아도 가세한다.

구경꾼 중에는 웬 벽안의 신사가 눈에 띈다.

워커힐호텔 부총지배인 번하드 브랜더. 장소섭외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게 요즘 방송형편인데, 연출자 장용우PD가 일찍부터 갈고닦은 영어실력으로 직접 섭외에 나섰단 후문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한때 친구였던 춘삼에게 모든 걸 빼앗긴 쥬신호텔 전 (前) 회장 주몽 (주현 분) 일행이 연회장에 들이닥치는 것. 그런데 이상하다.

주현을 뒤따르는 폭력배들이 가죽부츠에 선글라스차림인 남포동을 비롯, 어째 다들 전성기를 지난 모습이다.

맨끝에 선 권해효와 안재욱은 아직 덜 자란 듯한 인상. 어두운 주먹세계를 배경으로 건달 준호 (안재욱 분) 와 미장원보조 민주 (오연수 분) 의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라면 으레 검정 일색차림에 군기바짝든 '어깨' 들이 등장해야 하는 게 아닌가.

연기자 주현의 말. "처음에는 이번에야말로 뭔가 한 번 보여주겠다고, 보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근데 대본을 볼수록 그게 아니었다.

" 기획자 이은규CP가 설명을 대신한다.

"실패하고 이름만 남은, 개그맨 이경규의 느와르영화 '복수혈전' 제목을 빌려온 것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풍자다.

우리가 그리려는 것은 폭력미학이 아니다.

젠 체 하거나 난 체 하지도 않는다.

한국사회의 덜 선진화된 부분을 폭력의 3류성에 빗대 과장되게 그려낼 것이다.

" 작가 김기호.이선미부부는 "힘과 권력의 상징으로 조직폭력배란 직업을 빌려왔을 뿐" 이라면서 이 드라마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풍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느와르장르 자체에 대한 패러디를 노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대선막바지, 연말 시청자들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 '정치' 에 대한 미묘한 풍자라니. 연출자 장용우PD의 말을 덧붙인다.

"특별한 메시지는 없다.

즐거운 드라마, 즐길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겠다.

혹, 작가와 PD가 은밀히 동의한 음모가 있다면 난장판같은 세상에 대한 풍자를 건져보겠다는 것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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