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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정당개혁 없이 정치발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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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대의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정당이 근간이다. 정당을 중심으로 그 나라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를 구체적 정책으로 제시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고 이를 실현시켜나가는 제도다. 그러나 우리 정당들은 정책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지역 기반에 의지해 상대 당을 궁지로 몰기 위한 비방과,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정당정치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당이 제시하고 추구하는 정책에 일관성이 없고 정책 기능도 아주 취약하다. 자신들이 여당일 때 추진했던 정책도 야당이 되면 반대하기 일쑤다. 이러한 전통을 자랑하기는 지금 야당인 민주당이나 지난 두 정권에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정당들이 집권했을 때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해 나가는 일은 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전문관료의 영역에 머물고, 정당과 행정부의 정책 추진에 대한 연결고리는 미약하다. 집권여당의 국정에 대한 책임성도 부실하다.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지면 당명을 바꾸고 대통령과의 관계를 절단하여 지역정서에 기대 선거에서 이겨 보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불행히도 민주화 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다. 노태우 정부 이래 집권한 지난 네 정부에서 모두 예외 없이 대통령이 당의 압력으로 임기 말에 탈당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총 31개월간 정당에 기반하지 않은 국가통치가 수행돼 왔다. 이는 정당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고 과연 우리는 국정을 주도해갈 정부와 인사를 국민이 선출하는 민주주의적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지금의 정당들이 지역정당에서 벗어나 전국정당으로, 그리고 정책정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한국정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와 국가정책에 대한 목표를 보다 명료하게 제시하고, 이에 동조하며 이를 실현하려는 유능한 젊은 정치지망생들을 당으로 끌어들이려는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줄기차게 일어나야 한다. 당 주변에 여러 연구조직들을 만들어 활성화하고 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구체적인 전략과 정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당의 지도적 인사들은 지역정서에 의존해 쉽게 당선되고, 쉬운 정치를 하려는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개혁 움직임이 활발해진다면 국민들은 우리의 현실에 비해 너무 협소하고 엄격하게 규정돼 있는 지금의 정치자금법을 다시 손질하는 것도 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젊고 뜻있는 인재들이 정당으로 모이고 활발한 정책개발과 토론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감옥의 담장 위를 걸어 다닐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현실’을 개선해 주어야 한다. 재력 있는 사람들만이 합법적 정치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지역정당의 고질적 병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중선거구제로의 개편이나 비례대표제의 확대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박연차 리스트’로 떠들썩하다.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의 정치자금법이 현실과 괴리돼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가능성 있는 젊은 정치인들이 이로 인해 좌절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치의 수준은 궁극적으로 그 나라 국민의 책임이다. 드러난 불법행위에 고소해 하거나 분노만 하고, 내재한 문제들에 대한 아무런 성찰도 없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이러한 푸닥거리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조윤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