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주권 되찾은 날] 성과없는 군정…임정에 숙제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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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8일 폴 브리머(63) 연합군 임시행정처(CPA) 최고행정관은 담담했다. 이날 이라크 주권 이양식 행사가 끝난 뒤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그다드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브리머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연합군 측은 "브리머 행정관이 이라크를 떠났다"며 "출국 시간은 낮 12시30분(한국시간 오후 5시30분) 이후"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브리머의 속은 끓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지 소식통은 "1년2개월에 걸친 군정 기간에 내세울 만한 성과는 없었다"며 "임시정부에 숙제만 잔뜩 남겨놓고 가는 브리머의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친 브리머는 직업 외교관으로 아프가니스탄.말라위.노르웨이에서 근무한 뒤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는 등 23년간 미 국무부에서만 근무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브리머의 인생은 전환기를 맞는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 밑에서 대 테러 담당 무임소대사를 역임한 것이 계기였다. 이 경력으로 그는 1999년 하원에서 대 테러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브리머가 국무부 출신이지만 '테러 전문가'로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브리머가 일약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1년 9.11 사태 이후다. 그가 한해 전인 2000년 6월 의회에서 "41년 진주만 공격 같은 대규모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인 '테러통'으로 인정받았다. 브리머는 정보기관들의 자만과 나태를 비난하면서 이슬람 무장단체 지도자의 암살을 주장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 을 사실상 진두지휘했다.

중동 경험이 전무한 브리머가 미 군정 최고행정관으로 임명된 것도 이 같은 그의 배경과 성향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1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종전을 선언한 직후 이라크 내 정정이 테러와 시위로 불안해지자 부시 대통령은 즉각 그를 군정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브리머가 이끈 군정은 뚜렷하게 이뤄놓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라크 내 파벌 싸움은 종전 직후보다 더 꼬인 상태고, 납치.폭파 등 테러는 연합군의 통제를 벗어난 지 오래다. 심지어 주권 이양식조차 숨듯이, 쫓기듯이 치렀다. 브리머도 쫓기듯이 이라크를 떠나야 했다.

암만=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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