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이 머무는 공간⑦ 헤이리의 자하재(紫霞齋)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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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31면

①마당을 잘게 나눈 벽면에는 크고 작은 네모 난 구멍이 있다. 구멍을 통해 본 주변 풍경은 액자 안 그림처럼 보이는 듯했다. ②자하재는 3개의 블록으로 나뉘어 있다. 양쪽 블록은 박돈서 교수 와 아들이 각각 거주하고 주차장이 있는 가운데 위층은 손님을 위한 공간이다. ③박교수 집과 아들의 작업실을 연결하는 좁은 복도에는 각종 상패·트로피와 가족사진 등이 배열돼 있다. 신동연 기자

서울 도심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경기도 파주시 문화예술인마을 ‘헤이리’. 그곳에 단독주택인 자하재(紫霞齋)가 있다. 건축가 박돈서 아주대 명예교수의 집이다. 540㎡ 정도의 크지 않은 대지에 자리한 집은 아티스트인 아들과 박 교수 두 세대를 위한 공간이다. 교외의 단독주택이지만 많은 집이 모여 있고, 다양한 문화와 상업시설이 함께 있는 단지 안에 있다. 도시와 같은 집, 인공과 자연이 복합된 집을 만든다는 것이 건축가 김영준씨의 의도였다. 모든 실내의 방에 대응하는 실외의 공간을 만든다는 원칙에 입각해 23개의 작은 마당을 만들었다.

사적인 체험이 바깥과 만나는 곳 집은 작은 도시다

도면과 사진만으로 본 집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건축가의 논리는 명확하고, 도면과 사진은 재미있지만 실제 공간은 어떨까. 답답하지 않을까. 작은 마당들이 제대로 쓰일까. 가장 일상적이고 편안해야 하는 곳이 집이라면 이렇게 강한 건축 개념이 살림집으로 적절할까. 그렇게 공간을 잘게 쪼갠다고 집이 도시가 될 수 있을까.

사진만을 본 상황에서는 이런 회의가 충분히 들 수 있다.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 건축은 실제 현장과 사진 영상매체에서 보는 느낌 사이에 커다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건물 내부 공간을 촬영할 때 대개 광각렌즈를 쓰기 때문에 실제보다 사진에서 더 넓고 깊게 느끼게 된다. 좁은 공간도 시원하게 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진의 거짓이며 이미지의 마술이다. 그런데 이 집은 사진에서조차 좁아 보였다.

눈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집
그러나 실제로 집을 본 순간 경이로운 발견을 했다. 이 집은 눈으로 보는 집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집이었다. 사진보다 넓어 보인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 집은 아예 사진으로 잡히지 않는다. 사진은 앞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면 이 집의 공간은 온몸을 둘러싸고 있다. 집에 분산돼 있는 중정(中庭)들의 빛과 풍경 쪽으로 시선이 끌려서만이 아니다. 방마다, 마당마다 그곳을 사용한 생활의 체취가 느껴진다. 보는 마당, 쉬는 마당, 가꾸는 마당도 있다. 23개의 마당 중에 두어 군데는 내부 공간으로 쓰고 있는데 이것 또한 마당을 쓰는 한 가지 방법이다. 공간들은 바뀔 수 있고 열리거나 닫힐 수 있다.

아파트든 개인 주택이든 거실의 전형적인 풍경은 넓은 창과 그 너머의 열린 풍경이다. 이 집의 거실은 한 방향으로 이렇게 트여 있지 않다. 거실의 소파에 앉으면 한 발짝 옆에 마당의 촉촉한 풀잎이 있고, 등 뒤에 방금 걸어 지나갔던 빈 공간이 느껴진다. 열 발자국 앞에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슬쩍 흔들린다. 1층 미로와 같은 안팎의 방을 거쳐 2층 테라스로 나올 때 비로소 바깥의 먼 경치가 열린다. 이때도 여러 방을 거닐던 몸의 감각이 차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까지 서양인들은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기억술을 발전시켰다. 연설문의 순서를 기억하기 위해 연설자는 자기가 친숙한 건물 속을 거닐고 있다고 상상했다. 지나가는 방마다 구석구석의 특징을 연상하며 연설의 특정한 구절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런 집을 ‘기억의 궁전’이라고 불렀다. 비가 그친 직후의 기분을 기억하기 위해 하얀 벽을 떠올린다. 하얀 벽은 우유를 연상케 하고 우유는 입 속의 촉촉함을 자극한다. 마음의 눈으로 이어 가는 연상의 고리에는 정답이 없다. 공간에 대한 개인적 기억이 엮어 내는 스토리다. 아주 사적인 기억과 대중을 강력하게 설득하는 공공의 연설문을 매개해주는 것이 건축적인 상상력이다. 이들에게 건축은 수사학이다.

이 집에서도 주인들이 걸어왔던 삶의 흔적을 내밀한 공간과 함께 발견하게 된다. 박 교수가 사는 칸의 현관에 들어서면 거실과 부엌 사이 공간에 여행하면서 모아 놓은 세계 건축의 미니어처들이 수십 종 진열돼 있다. 가장 최근에 모은 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의 작은 모형이 로마의 콜로세움과 나란히 마당의 은은한 빛을 받으며 전시돼 있다. 살림집이라는 아주 사적인 공간에서 상대적으로 공적인 영역이다. 집주인 자신이 다녔던 여행의 기억일 테고 집을 방문한 손님들과 교감하는 장치다.

또 다른 마당을 거쳐 아들의 집을 방문한다. 작은 거실에서 작은 복도를 지나면 아티스트의 서재와 작업실로 이어진다.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폭을 가진 이 복도의 한쪽 면에는 아티스트가 소중하게 모아 놓은 여러 상패가 눈높이 약간 아래에 빼곡히 진열돼 있다. 벽의 반대편은 눈높이, 그리고 그보다 조금 높은 정도에 그가 만든 작품의 사진과 가족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건축가도 집주인도 이곳을 지나가는 복도가 아니라 좁고 긴 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티스트의 기억과 상상력이 여러 개의 작은 흔적으로 배열된 방이다.

주인과 손님의 교감공간
아버지의 건물 미니어처, 아들의 상패와 트로피. 집 안의 이런 전시 공간은 전혀 영웅적이지 않다. 과시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곳은 자신의 기억을 되새기고 그것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여 주는 전시관이다. 집주인은 대중이 잘 아는 아티스트이지만 그의 집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공인인 만큼 그의 집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다. 하지만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이 작은 집에도 개인의 기억과 집을 방문한 ‘공공’을 향한 수사학이 함께 존재한다. 그러기에 이 집을 도시라 부르고자 하는 건축가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40여 년 전에 작고한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은 도시를 “어린아이가 커서 무엇이 될지 깨닫게 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에 대한 정의다. 도시는 집과 사람이 많다고 도시가 아니다. 개인의 욕망과 개인의 기억이 많이 모여 있다고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체험이 기억으로 남고 개인의 기억이 공공의 상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곳이 도시다. 도시와 같은 집, 집과 같은 도시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자신의 체험, 체험에 대한 기억 그리고 여기서 샘솟는 욕망을 자기보다 큰 세상 속에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배운다. 놀랍게도 그 집의 건축은 그 아이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그 기억을 상상력으로 키워 주는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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