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woman style] 무대 위 저 옷, 거리에서도 통하겠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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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콧대 높은 파리의 디자이너들마저도 초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많은 디자이너가 자기 브랜드만의 DNA를 찾는 동시에 실제로 거리에서 입을 수 있는 세련된 옷을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들의 생존 전략은 ‘위기일수록 본질에 충실하라’였다.

샤넬의 칼 라거펠트도 백전노장답게 이 전략에 충실했다. 무대에 오르는 옷마다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더 실용적으로 보일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샤넬의 상징인 블랙 트위드코트와 슈트를 비롯해 프릴, 커프스, 카멜리아(동백꽃) 장식은 여전히 고수했지만 예상 밖의 핑크 아이템들을 등장시켜 쇼장의 흥을 돋웠다. 향수·아이팟·립스틱·선글라스가 한꺼번에 세팅돼 있어 장난감처럼 깜찍해 보이는 핸드백의 등장은 그때까지 세련돼 보이기만 했던 옷들에 유머 감각까지 불어넣었다.

니나리치의 무대는 ‘근래 중 최고’라는 평가를 얻었다. 수석디자이너 올리비에 테스켕이 이번 쇼를 끝으로 브랜드를 떠날 것이란 소문이 패션업계에 퍼졌는데, 그래서 더 집중력을 발휘한 걸까. 일상생활에서 요긴하게 입을 스키니팬츠와 어깨의 각을 살린 재킷, 니트톱을 보여 주면서도 자신만의 창의적 상상력을 교묘히 섞은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랑방도 파리 컬렉션의 톱 쇼답게 ‘우아함’에선 최고였다. 히치콕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클래식한 레이디룩을 입은 모델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공언한 수석디자이너 알버 엘바즈는 1950년대에 디올이 선보였던 ‘뉴 룩’을 재현한 듯 둥근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재킷과 무릎까지 오는 치마 등 바로 입고 외출해도 무리가 없는 아이템들을 보란 듯이 내놓았다.

쇼가 슬슬 지루해질 만한 7일째, 드디어 ‘사건’이 벌어졌다. 독특한 무대를 만드는 재주가 탁월한 알렉산더 매퀸이 이번에는 무대 한가운데에 타이어·소파·TV까지 마구 쌓은 재활용 쓰레기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 하지만 어두운 조명이 거치고 등장한 건 디올의 ‘뉴 룩’과 오드리 헵번이 사랑했던 지방시의 ‘빈티지 룩’을 매퀸 식으로 복원한 판타지 디자인들이었다. 쇼 시작 전에 “경제위기는 내 탓이 아니다”며 자신의 스타일대로 무대를 펼칠 것을 밝혔던 매퀸. 새 프린트와 깃털로 완성한 그의 드라마틱한 의상들은 분명 다른 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도 높은 창작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매퀸의 쇼처럼 장외 홈런을 날리진 않았지만 영리한 안타를 쳐 낸 디자이너도 많았다. 드리스 반 노튼은 검정과 회색으로 가을겨울 시즌에 딱 맞는 차분한 배색을 선보여 관객의 눈을 즐겁게 했다. 핑크 재킷과 빨강 블라우스, 낙타색 바지를 조합하면서도 요란스럽지 않게 만드는 건 노튼 같은 거장이 아니고선 못 해낼 일이다. 에마뉘엘 웅가로에서 세 번째 무대를 선보인 수석디자이너 에스테반 코르타자르는 화려한 프린트와 컬러 믹스, 완벽한 입체 재단까지 곁들인 블라우스·미니스커트·드레스로 연타석 안타를 쳤다. 관객이 브랜드에 기대했던 수준에 딱 맞춘 네 가지 색깔의 도트 프린트가 들어간 미니 드레스는 불경기에도 여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 게 분명하다.


이번 파리컬렉션을 보고 일부에서는 ‘창조적인 감성이 사라졌다’고 평가할 것이다. 확실히 예년보다 놀라운 볼거리가 줄었으니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도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다. 경제위기는 벌써 닥쳤는데 ‘나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디자이너는 어리석다. 하지만 규모를 줄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파리 패션계의 백전노장들은 거리에서 쉽게 입을 수 있는 옷들에 더 많은 테크닉과 교묘한 아이디어를 숨겨 놓았다. 실용성으로 무장한 창조적 아름다움은 오는 가을겨울에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이청순 ‘코스모폴리탄’ 패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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