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이현세씨 이미지 변신 선언…천국에는 '까치'가 살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실패는 운명이다.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온몸을 던져 숙명에 저항한다.

앞길을 막고 있는 적은 공룡같이 거대한 조직이거나 지독한 강자, 때로는 사회 전체다.

그래도 굴복은 없다.

목숨이 끊어지고, 나락에 빠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

설사 승리를 쟁취해도 남는 것은 만신창이의 몸뚱아리뿐. 마치 '노인과 바다' 의 노인처럼….

만화가 이현세 (43.세종대 교수) 씨가 그려내는 작품세계다.

그가 사회를 향해 던지는 처절한 메시지는 늘 더벅머리의 반항아 '까치' 를 통해 표출된다.

그는 지금 까치를 날려보내려 한다.

아니, 자신이 까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가 20년 작가인생을 건 대작 '천국의 신화' 에 까치를 등장시키지 않기로 한 것이다.

5년간 1백권을 그릴 이 서사시에서 까치의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서다.

"이전에도 까치가 나오지 않는 작품을 가끔씩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독자들은 새로운 주인공을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까치가 나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죠. 까치를 사기꾼, 비열한 인간으로 등장시켜 이미지를 바꾸려는 시도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가면 까치가 개과천선할 것' 이라는 독자들의 단정과 무언의 압력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 이씨가 던진 승부수 '천국의 신화' 는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닥쳤다.

지난 7월 검찰이 이 작품을 '음란.폭력물' 로 간주하며 이씨를 소환조사한 것. 상황은 청소년보호법 시행과 맞물리면서 시중 서점의 70%정도가 납품을 받지 않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천국의 신화는 우리 상고사를 '환단고기' 같은 민족주의 역사관에 바탕을 두고 그려나가는 작품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름 없던 태고시절 장면에서, 동물 같은 행동을 하는 건 당연하죠. 오히려 이런 것이 빠지면 리얼리티가 떨어지지요. 그것에 대해 음란.폭력을 얘기한다는 것은 전체 작품의 맥락이나 작가의 취지를 철저히 무시하는 시각입니다.

" 그는 이번 사건을 통해 만화책을 만화가게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했다고 한다.

서점에서 다른 책들과 경쟁을 하지 않고 대본소에 안주하는 현 상황에서 작품성 향상을 기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다.

"좋은 작품이건 엉터리건 늘 같은 부수가 팔린다면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어요? 작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산업화나 육성책을 얘기한다는 것은 아이러니죠. " 일본의 경우 만화영화작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무정부주의적 인류공동체에 대한 신념' (미래소년 코난) , '인간의 자연파괴에 대한 경고' (원령공주) 등 분석과 비판이 인다.

히트작의 경우 시중 서점을 통해 3백만부씩 팔리니 우리 만화가들로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작가들에게도 분명, 그들만의 작품세계가 있다.

이씨는 '기존 질서에 의해 약자로 규정된 자의 처절한 승리'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피어나는 지고지순한 사랑' 등의 주제를 일관되게 그려왔다.

독자타깃도 명확하다.

학생과 35세 미만의 생산 근로자들. 순수한 꿈을 갖고 있다는 것과 '먹고 사는' 생존현장에서 정직하게 일한다는 사실이 그를 끌어당긴다.

"샐러리맨은 자신 없어요. 그들은 사회에 섞이며 많이 무뎌졌거든요. 감동도, 접근도 어렵습니다.

제가 회사원 생활을 못해봤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 그는 약 1백만명 (전국 8천여 대본소에서 1백여명씩 본다는 계산) 의 고정독자에게 패배를 무릅쓴 '과정의 승리' 를 강조한다.

결국 허무로 돌아가지만 그 노정에서 온몸을 불사르며 느끼는 환희 (96년작 '아마게돈' ) 를, 죽음을 각오한 강인한 의지 (79년작 '격정의 까치머리' ) 를 진정한 가치로 묘사한다.

성공으로 결말을 맺는 삶은 현실 속에서도 흔치 않다.

그래서 이 작가는 어두운 미래를 솔직하게 조명하되, '인생에 있어 결과와 과정은 별개' 라는 의미를 던지는 것이다.

'천국의 신화'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밝다.

어쩌면 그의 작품세계에 담긴 그대로의 스타일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창작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일부 작품에는 까치를 등장시키되, '이현세 = 까치' 라는 고정관념을 깰 수 있도록 참신한 주인공을 통해 또다른 세계를 표현할 것입니다.

'소리' 와 '빛깔' 을 도구로 쓸 수 있는 애니메이션 역시 저에겐 필연입니다."

강주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