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영컬처 산책]2. 너희 앞에서 어른들은 작아진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주말의 종로통을 거닐면서 길가 큰길보다는 뒷골목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도심을 화려하게 수놓으며 저마다 당당한 포즈로 급습하는 신세대의 물결을 피하기 위함에서다. 아무래도 내 나이 탓도 있으리라. 아이들로 붐비는 패스트푸드점과 레코드점이 즐비한 도심의 이면공간에나마 백열등 불빛 아래 선술집이 버티고 있는 사실에서 나는 새삼 고향 같은 정겨움을 느끼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세대에게 무슨 억하심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 사실 누구에게나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은 있으며, 분명 이유있는 반항과 치기가 어우러진 그 시절의 기억을 마음 한켠에 빛바랜 사진으로 간직하게 마련이다.

하여, 어스름한 저녁녘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 앉아 키스를 주고받는 연인을 보면서 ‘아,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를 회상하며 엷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사실 언제까지나 청춘을 유지한다면, 그 무슨 재미 있으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며 사는 것. 이 또한 인생의 지혜가 아닐는지.

하지만 인생의 지혜만을 논하기에는 시절의 변화가 너무 가파르다. 저간의 ‘행군(行軍)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10대들의 유례없이 감각적인 문화전략들이 모든 문화를 급속도로 점령해 가고 있다. 방송공간을 점령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근래에는 기성세대들 최후의 문화공간인 신문과 출판마저 서서히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회적 대세인 신세대는 이제 대중문화의 판도마저 바꾸고 있다. 그들이 내보이는 낯설고 이질적인 면모는 적어도 나이 든 교복문화 세대에게는 일종의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모든 세대는 스스로를 독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 세대에겐 자신들과 같아야함을 전제하곤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세대간 불협화음의 원천이리라. 우리가 당면해야 할 사회적 갈등은 경제적 맥락에서 인식되는 계급갈등보다는 세대간 문화적 부조화에서 올 터이다.

신세대의 돌출성 자체를 일과성 문화충격으로만 봐서는 능사가 아니다. 대신 그것이 우리 삶과 문화의 새 국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변동의 소산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그런가.

첫째, 신세대는 풍요사회의 자녀들이다. 이들이 대중문화의 주된 소비층 내지 향유층으로 부각되기에 문화소비세대라는 말도 나온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축으로 하는 탈산업적 경제구조 하에서 문화상품이 새로운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떠오르며, 이를 배경으로 문화상품의 소비가 10대와 20대에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올해 한 기업연구소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90년대 최고 히트상품으로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신세대는 기성문화의 반란자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기성문화의 훈육을 받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이는 기존의 문화관에 중대한 도전의 의미를 품는다. 사실 기성세대는 문화란 자신들이 만들어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란 편견에 알게모르게 젖어 있다. 하지만 신세대의 문화 의식은 기성세대의 인증을 요구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로, 록카페의 무질서는 권위적인 혹은 허위의 질서에 대한 그들 의식의 표출이며 그 속에는 전통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반항아로서의 ‘아들’의 모습이 있다.

셋째, 신세대는 키치(kitsch) 미학의 천재들이다. 키치란 저속하고 나쁜 취향의 시시한 사물과 이미지를 총칭한다. 그동안 ‘쓰레기와 같이 하찮은 것’이라고 해서 미학적 분석에서 제외된 바 있으나 신세대 문화에서는 고급과 저급은 하나의 개념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일상 영역에서 정치나 종교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상사가 키치화해 버린다. 이렇듯 키치가 범람하는 곳에서 유행이 소용돌이치며, 이로부터 모든 가치나 진지함에 대해 회의적이고 냉소적 태도가 분출하게 된다.

같은 기성세대라도 어느 면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신세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며 그 다름으로 인해 찬반양론이 분분한 것이다. 신세대에게서 ‘풍요사회의 자녀’라는 면을 중시하는 기업은 ‘서태지로부터 배우자’는 구호를 새로운 기업논리로 내세우고, ‘기성문화의 반란자’라는 면모만 보는 부모 세대는 ‘저게 정말 내 뱃속에서 나온 놈이냐’라는 식으로 아연실색하고, ‘키치미학의 천재들’앞에서 기성 예술가는 ‘신세대의 취향은 유행에 민감하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한다.

어쨌거나 오늘날 풍요와 저항과 키치 속에서 그 모습이 형성된 신세대는 경제성장의 가장 큰 수혜자로서, 가장 큰 희생자인 부모세대와는 크게 다른 정서를 갖고 있다. 기성세대가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소유 중심적’ 태도를 지닌데 반해 신세대는 풍요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 ‘소비 중심적’이다.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아서인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신세대의 정체성은 전통적인 시각으로 볼 때 다소 불안하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기성세대의 모습 혹은 우리의 역사 자체가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뜻에서 신세대문화는 세기말 한국사회가 품고 있는 ‘뜨거운 감자’라 부름직하다. 기성세대로서는 흔쾌히 손을 내밀어 공유하기도 뭣하고,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그들의 잠재력이 너무 크다.

이래저래 곤혹스러운 신세대와 그 문화,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룰 것인가. 그것은 선뜻 풀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숙제로 다가서고 있다. 물론 미래는 그들의 몫이지만 ‘고개숙인 세대’라고 해서 그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필자 김성기

▶60년생

▶문화비평가로 계간

‘현대사상’ 주간

▶93년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논문집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사회과학’(91년)

평론집 ‘패스트푸드점에

갇힌 문화비평’(96년) 등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