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 살 돈 없어 수출도 못 해” vs “빌려줄 만한 기업이 없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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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소기업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 힘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요즘은 더 심하다는 게 중소기업 쪽의 목소리다. 은행도 할 말은 많다. 떼일 게 뻔한데 정부가 독려한다고 아무렇게나 대출해 줄 수는 없다는 반박이다. 요즘 중소기업이 말하는 은행, 은행이 말하는 중소기업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중소기업이 본 은행

BIS 비율 맞추기만 급급
무역금융마저 안 해주니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맞춘다면서 은행이 무역금융도 해주지 않고 있어요. 은행이 먼저 살겠다며 기업의 수출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한 외환위기 때도 수출신용장을 들고 가면 무역금융은 해줬는데….”

경기도 안산에서 중장비 수출업체를 운영하는 김모(49) 사장은 얼마 전 은행에 운영자금을 빌리러 갔다가 면박만 당한 얘기를 했다.

“올해 받아 놓은 수주 물량만 200억원입니다. 은행을 찾아가 수주물량이 이 정도니 돈을 빌려 달라고 했죠. 은행 직원은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해요. 은행도 우리의 기술력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부채비율을 낮춰야 대출해 줄 수 있다는 겁니다. 먼저 물건을 팔아서 이익을 남겨야 부채비율이 낮아진다고 혼잣말만 하고 뒤돌아 왔습니다.”

은행 담당자는 이 회사의 부채비율이 높아 대출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업체는 지난해까지만도 부채비율이 400% 정도였다. 하지만 달러당 원화 가치가 바뀔 때를 대비해 나온 파생금융상품인 키코(KIKO)로 지난해 70억원대의 손실을 봤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부채비율이 500%를 넘어섰다. 은행이 이를 이유로 돈을 빌려 주지 않고 있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김 사장은 키코로 인한 손실을 매달 90만 달러씩 갚고 있다. 앞으로 6개월만 더 갚으면 키코로 인한 부채는 완전히 해결된다.

“운영자금을 안 빌려줄 거면 매달 갚는 키코로 인한 채무라도 완화해 달라고 했지요. 매달 갚는 키코 손실 대금을 90만 달러에서 30만 달러로 낮추고 기간도 6개월에서 18개월로 연장해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김 사장은 “지난달 40억원 규모의 수출 계약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은행의 대출 중단으로 원자재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출할 때 제품 선적에서 도착까지 걸리는 기간이 동남아는 10일, 중동은 40일이다. 김 사장은 이 기간 중 무역금융으로 돈을 미리 융통하곤 했다. 하지만 은행은 무역금융마저 중단했다.

“수출 대금은 한번에 70만~80만 달러입니다. 은행이 이를 빌려주면 이 돈은 은행에 10~40일간 ‘위험 자산’으로 분류돼 BIS 비율이 낮아지기 때문에 무역금융을 해주지 않는 겁니다.”  


김창규·심재우 기자

전문가들 “정부 재정투자 병행해야”

중소기업과 은행의 입장 차이가 나는 것은 ‘대출 기준 눈높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중소기업은 경기 침체로 가장 먼저 타격을 입었고 재무상황도 악화됐다. 그만큼 은행의 대출 기준에 맞는 중소기업이 줄었다. 중소기업은 현재의 어려운 경제 상황을 고려해 주길 기대하지만 은행은 기존의 대출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의 김병덕 선임연구위원은 “요즘 대출받으려는 중소기업은 대부분 은행 기준에 미달한다”며 “이 때문에 은행이 보증 없이 자체 판단으로만 대출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은 지난해 12월 1조8000억원 감소했지만 올 1월에는 정부의 대출 독려 덕에 3조1000억원이 늘었다. 금융연구원은 그러나 1월 순증액의 96%는 정부의 중기 지원 확대정책에 따른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보증에 의한 대출로 추정했다. 지난해 전체 중소기업 대출에서 보증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10.4%에 불과했다.

김 연구위원은 “우량기업은 은행을 통한 대출을 할 수 있지만, 비우량기업은 신보·기보의 보증부 대출이 불가피하다”며“성장 잠재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요 산업의 부품업체, 신성장 동력산업, 혁신형 기업을 우선 지원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갑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금융업계도 나름대로 중소기업 대출에 애를 쓰고 있다”며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재정 투자를 병행하고 장기적으로는 중소기업에 우호적인 지역 밀착형 은행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이 본 중소기업

가족·친지 명의로 돈 빌려
부채 규모 파악도 어려워

시중은행의 이모(54) 지점장은 “매주 월요일만 되면 안절부절못한다”고 말했다. 월요일마다 담당 부행장이 주요 지점장을 불러 중소기업 대출 현황을 점검하기 때문이다. 부행장은 때로는 읍소도 하고 호통도 친다.

이 지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중소기업에 돈을 빌려주라고 독려한 뒤로는 대출을 늘리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는 줄어 난감하다”고 말했다. 현재 이 지점은 1000여 개 중소기업에 약 2000억원을 대출해 주고 있다. 이 은행은 올 1분기에 중소기업 대출을 지난해 말보다 1조5000억원 늘리기로 했다.

“요즘 사람을 만날 때마다 대출해 줄 만한 중소기업 좀 소개해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중소기업 대출이 지난주보다 떨어지면 본점에서는 왜 대출이 줄어들었느냐고 다그칩니다. 그렇다고 아무 기업에나 대출해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2월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은 2.67%다. 지난해 같은 기간(1.40%)의 두 배 수준이다. 시중은행들은 연체율을 올해 중점 관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영업점 평가지표(KPI)에서 연체 부문 배점을 2배 이상 높였다. 지점장들이 연체율 관리에 매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은행도 구조조정 분위기인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으냐”고 반문하며 “어느 지점장이 섣불리 연체 가능성이 큰 업체에 대출을 해주겠느냐”고 말했다.

이 지점장은 경기 침체로 대출 수요도 줄었다고 말했다.

“대출을 받으려는 중소기업이 지난해 이맘때보다 절반 이상 줄었어요. 경기가 나빠 매출이 늘지 않으니 운영자금도 그만큼 필요하지 않은 거지요.” 그는 “기술력만 보고 중소기업에 대출해 줄 수도 없다”고 했다. 은행은 중소기업 대출 때 외부 평가기관에 의뢰해 기술력을 평가한다. 재무상황, 노사관계, 최고경영자(CEO)의 경영능력 등도 고려한다. 중소기업은 겉으로 드러난 재무제표만으로는 부채 규모를 파악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지 이름으로 돈을 빌려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올 초부터 대출을 크게 늘려 대출받을 만한 웬만한 중소기업은 대부분 돈을 빌려 갔습니다. 요즘 대출받으려는 중소기업을 보면 부도 직전에 몰려 운영자금을 융통하려고 손을 벌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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