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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극장에 깡패들이 판친다…TV 드라마 폭력 장면 위험 수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TV드라마에 깡패가 넘친다.

웬만한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폭력배들과 인연을 맺고 있고 드라마는 이들이 벌이는 폭력장면으로 메워나간다.

SBS '모래시계' 가 큰 인기를 끈 이후 요즘 폭력배들은 주인공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하며 폭력을 미화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이 휘두르는 폭력은 자칫 '정의' 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요즘 수요일과 목요일 밤이 되면 브라운관은 조금 심하게 말해 '뒷골목' 이 된다.

KBS2 '그대 나를 부를 때' 는 금고털이와 그의 농아 여동생, 그리고 형사반장이 벌이는 사랑얘기가 드라마의 한 축을 이루고 있지만 그 반대 축에는 경찰과 범죄조직의 갈등이 전면으로 부상되고 있다.

MBC '영웅신화' 도 마찬가지. 둘째아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폭력조직과의 문제가 극의 주요 갈등요소다.

한 정신적 장애아와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SBS '달팽이' 는 이들의 삶과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폭력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조차 극 초반부에서는 동네 깡패들과의 격투기가 감초처럼 등장했다.

12월1일 방영예정인 MBC 14부작 월화드라마 '복수혈전' 은 아예 호텔 나이트클럽과 룸싸롱을 무대로 신.구 조직폭력배들간의 권력다툼을 본격적으로 그릴 예정이다.

얼마전 종영된 KBS2 월화드라마 '열애' 는 부친의 복수를 꿈꾸는 젊은이가 지역 조직폭력배의 힘을 빌린다는 설정으로, MBC 월화드라마 '영웅반란' 은 정경유착의 비리를 벗긴다며 지역 건달들과의 계속되는 격투장면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전에 끝난 MBC '내가 사는 이유' 와 SBS '장미의 눈물' 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드라마사상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난 4월 막을 내린 KBS2 '첫사랑' 역시 조직폭력배들이 주요등장인물이었다.

과거 드라마에서는 폭력자체를 응징되어야할 사회악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혐오스러운 대상으로 묘사해왔다.

하지만 요즘은 폭력이 주인공의 반항적 이미지를 대변하는 도구가 되고 또 조직 폭력은 수익성 높은 '사업' 으로 묘사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가치관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이 방송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우리 사회에 불균형과 모순이 존재하는한, 폭력과 이를 응징하는 또다른 폭력은 드라마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폭력 장면이 나와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고 그러기 위해 조직폭력배가 등장해야 한다는 논리는 시청률 올리기에만 급급한, 잘못된 일이다.

일선PD들이 폭력에 대해 둔감한 것도 문제다.

얼마전 한국방송개발원이 학부모 2백40명과 방송3사 PD 64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결과 '요즘 TV에 폭력이 지나치게 많다' 라는 질문에 대해 학부모의 89.2%가 '그렇다' 고 말한 반면, PD는 62.5%가 '그렇다' 고 말해 폭력성을 인정하면서도 학부모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둔감한 상태를 나타냈다.

여성단체협의회 매스컴모니터회 전상금 회장은 "드라마는 한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할뿐 아니라 만들어내는데도 큰 힘을 발휘한다" 며 "우리 사회의 폭력이 드라마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고 다시 확대재생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드라마에서부터 폭력이 줄어들어야한다" 고 주장한다.

미국TV의 경우 지난 10월1일부터 청소년의 폭력물 시청을 원천봉쇄하는 V칩 제도 시행의 전단계로 기존 나이등급에 내용기준 등급을 세분화한 새 프로그램 등급제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9월1일부터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됐지만 방송사들이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말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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