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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800조 짜리 괴물 세 마리를 잡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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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첫째는 떠돌이 800조원이다. 요즘 이놈은 ‘대붕이 날개를 펴는(大鵬展翅)’ 기세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하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식욕도 갖췄다. 눈치가 9단인 데다 금융시장의 화약고로 불린다. 경제가 어려울 때 잔뜩 덩치를 키운 뒤 좋아질 기미가 보이면 주식·부동산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단기 부동자금, 놈의 정체다. 금융감독원의 분류에 따르면 은행·증권·보험사에 1년 내 찾겠다며 맡겨놓은 돈이다. 올 들어 두 달 만에 50조원이 늘었다. 이 달 말엔 8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사상 최대다. 1년 예산(284조원)의 약 3배, 한국 상장주식을 모두 사고(시가총액 700조원)도 100조원이 남는다. 떠돌이의 덩치가 커지면 시장이 불안해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놈의 팔다리 격인 초단기 금융상품인 머니마켓펀드(MMF)가 한 예다.

D증권사 남모 지점장의 경험이다. 한 달여 전 한 고객이 100억원을 들고 왔다. 안전한 곳에 1주일만 넣어 달라고 했다. MMF를 권했다. 약속한 1주일이 지났다. “찾아가시라” 했더니 “놔두라”고 했다. 일주일마다 그런 일이 반복됐다. 고객의 100억원은 지금도 그대로 MMF에 있다. 언제든 찾을 수 있으면서 안전한 곳이 달리 없더란 것이다.

MMF 단골고객 중엔 은행·농협·보험사도 있다. 나라에서 어려운 기업에 주라고 은행에 수십조원의 돈을 풀었더니 정작 은행들은 엉뚱한 곳에 묶어놓은 셈이다. 한 은행 자금 담당자는 “섣불리 기업에 빌려줬다 부도나면 은행도 덩달아 망가진다”며 “경제 사정이 좋아질 때까지 단기로 자금을 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돈을 풀어도 금융권에만 맴도는 이유다. 떠돌이는 불확실성을 먹고 산다. 경제가 밝아지고 살아날 때 떠돌이는 비로소 쪼그라든다. 떠돌이의 덩치를 빨리, 확실히 줄여주는 게 금융권의 최대 과제인 이유다.

둘째는 불가사리 800조원이다. 놈은 입을 떡 벌린 사막의 개미지옥 같다. 주로 가난한 이들을 먹이 삼는다.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가계 빚이 놈의 이름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가계 빚은 802조원이다. 1년 새 59조원이 늘었다. 국민 한 명당 1650만원꼴이다. 불가사리는 빈부 격차를 즐긴다. 격차가 커질수록 먹잇감인 가난한 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민생과 중산층을 강조했던 김대중(DJ)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불가사리의 먹이는 되레 늘었다. 불가사리가 극성을 부리면 근처 생물은 살아남지 못한다. 쓸 돈이 없으니 소비가 줄고, 경제가 망가진다. 사회 안전망은 불가사리를 없애는 데 집중돼야 한다.

셋째는 중국에 있다. ‘중국판 뉴딜’ 800조원이다. 녀석은 요즘 바쁘다. 중국 내륙 곳곳의 땅을 파헤친다. 도로를 놓고, 다리를 건설하고, 댐을 짓는다. 지난해 중국이 내수 부양에 쓰겠다며 밝힌 4조 위안(약 800조원)이 녀석이다. 세계 경제의 앞날이 녀석의 활약에 달렸다. 중국과 제일 많이 사고파는 우리 경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녀석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10년, 아니 100년 한국의 미래가 달렸다. 조짐도 좋다. 녀석이 벌여놓은 땅파기 덕에 한국의 굴착기가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우리 기업의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연안보다 중국 내륙 내수산업 공략에 집중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도 이런 쪽에 맞춰져야 한다.

우선 곧 열릴 4월 국회부터 세 개의 800조원을 잘 다뤄야 한다. 29조원의 추경을 처리하되, 떠돌이 800조원의 몸집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 불가사리 800조원의 발호를 막고, 중국판 뉴딜 800조원에도 올라타야 한다. 그게 모처럼 금융시장에 불어온 한 줄기 봄기운을 붙잡는 길이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