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씨 피살 충격] "전화 받았는데 김선일은 기억 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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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와 AP통신 사이에서 진실게임이 벌어졌던 '김선일씨 실종 문의' 논란이 이틀 만에 사실로 확인됐다. 25일 외교부의 공식 발표는 외신 기자와 통화한 기억을 가진 외교부 직원이 있다는 것이다. 김씨 납치사건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제대로 된 협상조차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외교부는 이로써 더욱더 몰리게 됐다.

그러나 AP통신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씨 실종 가능성을 의심하고서도 당사국인 한국 정부엔 단순히 알아보는 정도의 조치만 취한 것은 인명이 걸린 사안을 경시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외교부는 이날 해당 직원의 진술서를 감사원에 제출했다. 보다 정확한 진실은 이제 감사원의 손에 맡겨진 셈이다.

◇통화 상황.내용=AP 측의 문의를 받은 외교부 직원은 자세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통화가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고 진술했다. 그의 진술서에 따르면 외신 기자가 "한국인 실종 사실을 알고 있는가"라고 물어서 "그런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하고 끝났다는 것이다.

이 직원은 통화한 것은 기억하지만 상대방이 AP통신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술했다. 한국인 외신 기자로 기억될 뿐 더 자세한 사항은 모른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이 직원이 통화일과 시간도 정확하게 진술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라크 교민 관리와 관련된 주무 부서 중 하나인 아중동국 직원들도 일일이 조사했다. 이 중 사무관급 외무관 한명이 "통화한 것 같기도 하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외교부는 그 시기로 볼 때 이 직원이 문제의 6월 3일 AP통신과 통화한 당사자는 아닌 것으로 내부 결론을 내렸다.

◇면책 어려운 외교부=이라크에서는 지난해 11월 이후 확인된 것으로만 세차례의 한국인 피살과 억류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11월 30일 오무전기 직원 두명이 피살됐고, 4월에는 각각 한국인 NGO 두명과 목사 일행이 억류됐다 풀려났다. 그러자 외교부는 지난 4월 이라크 교민의 안전을 위한 일일 점검체제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같은 달 이라크를 특정 국가로 지정, 입.출국 통제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외교부 직원이 이라크 교민의 실종 문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면 외교부의 교민 보호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위험 지역에서의 자국민 실종 여부에 관한 정보가 상부나 관련 부처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시스템도 문제다.

외교부는 24일 AP통신이 "지난 3일 한국 외교부에 실종을 문의했다"고 보도하자 사실 확인작업에 주력하기보다는 AP 측이 먼저 해명하는 게 맞다는 태도를 보였다. 정부의 공신력이 크게 훼손될 수 있는 사안인데도 안이한 대응을 해 결국 더 큰 망신을 당한 셈이다.

◇AP통신 책임론=AP통신 역시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납치가 빈번한 이라크에서 외국인의 실종으로 의심되는 비디오테이프가 발견됐다면 AP 측은 당연히 해당 국가에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한 외교부 관계자는 "AP 측이 한국인이 나오는 비디오테이프가 이라크에서 발견됐고, 해당 인물이 이름과 생년월일 등을 말하더라며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며 실종 문의를 했다면 그걸 쉽게 넘겼을 직원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AP통신은 24일 "실종 여부를 독자적으로 취재하기 위해 통화할 때 비디오테이프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독자적인 취재를 위해서라면 인명에 대한 중대한 정보 제공을 미뤄도 되는 것인지, 그것이 과연 언론 윤리에 합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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