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 꼴찌 졸업 51년 뒤 최고봉 오른 日 과학계의 ‘오야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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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2002년 고시바 마사토시 교수가 도쿄대 졸업식에서 한 축사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는 축사가 시작되자마자 “난 물리학과를 꼴찌로 졸업했다”며 대형 스크린에 자신의 ‘형편없던’ 성적이 담긴 성적증명서를 비추었다. 그러고는 “인생은 졸업 후에 자신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역설했다. “수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배운 건 모두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교과서를 의심하고 ‘규명의 달걀’을 언제나 두세 개 정도 품고 있어야 한다.”

어렸을 적 그의 꿈은 군인이나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학 시절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오른팔이 불편해져 꿈을 접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담임 선생님이 읽어 보라고 건네준 아인슈타인의 저서가 물리학과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물리학과에 진학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고교 3학년 겨울 기숙사 목욕탕에서 들은 한마디였다. “고시바는 물리를 잘 못하니 물리학과에 진학시키는 건 힘들겠어.” 목욕탕 창 너머로 들려온 선생님의 말에 그는 승부욕이 발동해 시험까지 남은 한 달 동안 맹렬히 공부해 결국 도쿄대 물리학과에 합격했다.

그는 자칭 ‘10년 후에 가격이 오를 주식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눈’을 갖고 있다. 뛰어난 감(感)으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속속 내놓는 데는 후진들도 혀를 내두른다. 뉴트리노를 포착하기 위한 거대한 장치를 만들 때도 3000t의 물을 담은 탱크 속의 광(光)센서 직경을 50㎝로 늘리는 방법으로 감도를 향상시켰다. 당시만 해도 아무리 광센서를 크게 해 봐야 물탱크에서는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고 기껏해야 직경 5㎝를 사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83년 관측을 개시해 4년 후인 87년 2월 초신성 폭발에 의해 생긴 뉴트리노 12개를 검출하는 데 성공했다.

고시바 교수는 연구의 큰 흐름을 만들어 놓은 다음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맡기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도쿄대 물리학과 출신 중에서도 그의 연구팀은 유난히 결속력이 강해 ‘고시바 마피아’로 불린다.

그는 여생의 두 가지 키워드를 ‘아시아’와 ‘과학교육 보급’으로 잡고 있다.

‘아시아’. 그는 전 세계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해 매년 독일에서 개최하는 캠프에 2006년 강사로 참석했다가 같은 행사장에서 만난 대만의 리위안저(李遠哲) 박사와 “이런 걸 아시아에도 만들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2007년 대만에서 ‘아시아 사이언스 캠프(ASC)’가 창립됐고, 지난해 인도네시아 캠프를 거쳐 올해 8월 일본 쓰쿠바에서 세 번째 행사가 열린다. 에사키 레오나(江崎玲於奈·73년 물리학상), 노요리 료지(野依良治·2001년 화학상),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2002년 화학상), 고시바 교수,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2008년 물리학상) 등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5명 외에도 대만의 리위안저 박사, 중국의 양전닝(楊振寧·57년 물리학상), 중국계 미국인 새무얼 팅(76년 물리학상) 등 총 8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참여한다. 아시아 각국에서 참가를 희망하는 200명의 학생(고교 3년~대학원생)과 노벨상 수상자들이 일주일간 합숙하면서 영어로 심도 있는 대화와 토론을 한다. 아시아 전체 과학교육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취지다.

ASC 자문위원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고시바 교수는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기초과학이란 보람찬 일’이라는 것을 실감시키고, 아시아가 중심이 돼 21세기 기초과학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의욕을 보인다. 8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인도 정부의 수석 과학고문인 알 치담바람까지 합한 9명이 ASC의 자문위원이다. 아시아 공동체의 기반을 다지는 것인 만큼 한국의 참여도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과학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벨상 수상 상금을 털어 ‘헤이세이(平成)기초과학재단’을 만들어 전국에서 ‘즐기는 과학교실’을 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목욕하고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드는 게 40년 이상 계속된 그의 독특한 습관이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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