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 “승부는 9회 말 투아웃부터란 말 실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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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베이스볼 클래식’이라는 대회 명칭에 딱 어울릴 정도로 명승부였습니다. 3회 고영민의 실책과 연장 10회 임창용의 실투가 아쉽긴 하지만 대한민국 야구가 미국·일본·베네수엘라 등 세계 정상권 팀들과 대등한 경기를 할 정도가 됐다는 게 가슴 뿌듯했습니다.”

전문가급 야구 지식과 매니어 이상의 열정을 갖고 있는 정운찬(사진) 전 서울대 총장을 WBC 결승전 직후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정 전 총장은 “너무 긴장해서 아직도 가슴이 뻐근하다”며 큰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범호의 동점타를 보면서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다’는 말을 실감했다. 역전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인생의 축소판인 야구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일본이 한국보다 10개나 많은 안타를 쳤지만 한국이 끈끈한 수비로 버텨 마지막까지 명승부를 연출했다”며 “그렇지만 역시 일본 야구가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일본 타자들은 누구 하나 대포를 쏘려는 선수가 없고, 밀어쳐서 진루를 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만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구장인 다저스타디움에서 4번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하는 장면은 아쉬웠다고 한다. 하라 일본 감독이 너무 스몰볼에 집착해 호쾌한 야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은 “일본이 2연패를 달성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스몰볼이 롱볼을 이기지 못한다. 한국 야구가 추구하는 스몰볼+롱볼, 즉 토털 베이스볼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두산 베어스의 열성 팬인 정 전 총장은 “김인식 감독에게 큰 상을 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라의 부름에 응한 애국심과 상황마다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직관력은 큰 박수를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선수를 믿고 노장과 소장의 균형을 잘 맞춰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은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했다. 다만 결승에서 일본 타순이 한 바퀴 돌았는데도 임창용을 그대로 끌고 나가는 걸 보면서 ‘바꿔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은 들었다고 했다.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WBC 준우승을 차지했음에도 여전히 열악한 국내 야구 현실에 대해서도 정 전 총장은 할 말이 많았다. 우선 국내 야구장을 전면 개보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린내가 진동해 화장실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야구장에 누가 가고 싶어 하겠는가. 기존 야구장을 리모델링해 쾌적한 환경에서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정 전 총장은 “미국은 메이저리그가 30개 팀, 마이너리그가 240개 팀이나 있고, 고교 야구팀은 수만 개는 될 것”이라며 고교 야구 팀이 전국 통틀어 55개뿐인 우리 야구 저변 확대에 대해서도 아이디어를 내놨다. 유소년을 비롯해 야구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공부와 야구를 겸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모두 담지 말라’는 투자 격언처럼 학생 선수들도 학업과 운동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국 대회를 대폭 줄여 ‘이기는 야구’보다 ‘즐기는 야구’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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