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치 1번지 ‘요시다 궁전’ 화재로 전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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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총리가 어릴 때 자주 머물렀던 외할아버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 전 총리의 저택이 방화나 실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전소했다. 22일 오전 6시쯤 가나가와(神奈川)현 오이소초(大磯町)에 있는 저택에서 불이 나 목조 2층 건물 900㎡를 거의 불태우고 소방대원들에 의해 진화됐다고 지지(時事)통신이 보도했다.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오이소초(大磯町)에 있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일본 총리의 옛 저택에서 22일 화재가 발생해 2층 목조 건물이 모두 탔다. 흰 연기가 치솟는 가운데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에 나서고 있다. [오이소초 AP=연합뉴스]


이 저택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최고의 정치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는 요시다 전 총리가 줄곧 사용하다가 노후까지 보냈던 곳이다. 화재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다. 가나가와현 소방서에 따르면 주택 내에는 24시간 경비원이 근무하고 있었고, 주변에 불이 날 만한 정황이 없었다. 소방 당국은 방화나 실화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저택은 요시다 전 총리의 부친이 1884년 건축했고, 태평양 전쟁 후 요시다 전 총리가 외국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기 위해 증축했다. 총 면적 3㏊에 목조 2층의 주택, 일본식 정원·내빈용 객실 등이 잘 가꿔져 있어서 ‘요시다 궁전’으로도 불렸다.

요시다는 “총리 관저가 정겨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총리 시절에도 관저 대신 이곳을 적극 활용했다. 정부 요인들을 불러 파티를 여는 것은 물론 자민당 내 파벌 영수들을 불러 정략을 꾸미는 아지트로도 활용했다.

요시다가 1967년 사망하고 나서 2년 뒤에는 규모 때문에 개인 관리가 어려워져 일본의 세이부(西武)철도가 매수해 호텔 별관으로도 활용됐다. 79년에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당시 총리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도 이곳에서 열렸다.

이같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장소여서 최근에도 이곳을 관람하는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가나가와현은 2012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키로 하고 세이부 철도 측으로부터 저택을 기부받는 한편 부지도 매수해 정비할 계획이었다.

어린 시절 이곳을 자주 방문했던 아소 총리는 이번 화재에 대해 “추억이 있는 건물이었다.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아소가 총리까지 출세한 것이 이곳에서 어릴 때부터 어깨 너머로 정치 감각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앞서 15일엔 요코하마(橫濱)시에 있는 중요 문화재인 구(舊) 스미토모케마타노 별장이 화재로 전소하는 등 일본에선 중요 유적지 화재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2007년 5월과 2008년 1월에는 후지사와(藤澤)시에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인 구 모건 저택에서도 불이 나 본관과 별관이 전소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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