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분노는 자업자득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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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호 02면

중국 춘추시대 때 일화다. 노(魯)나라가 제(齊)나라 환공에게 패하는 바람에 영토를 떼어 주고 강화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그 조인식 날 노의 한 장군이 뛰어들어 환공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땅을 도로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순간 모면을 위해 수락했던 환공은 그러나 아무래도 분했던지 장군을 죽이고 땅을 다시 뺏으려 했다. 이때 제의 명재상 관중은 “군주가 입 밖에 낸 말을 지켜야만 땅보다 더 값진 제후들의 신뢰를 얻는다”고 진언했다. 환공은 그 말을 받아들였고 후일 대업을 이뤘다. 역사가 사마천은 “주는 것이 곧 취하는 것임을 아는 지혜가 정치의 진수”라고 주석을 달았다. 강대국이라면 이 정도 풍모는 지녀야 한다.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미국의 행태를 보면 이런 풍모는 사라진 듯하다.

김영욱의 경제세상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던 11년 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지원 대가로 한국에 초긴축 정책을 요구했다. 고금리와 재정긴축을 골자로 한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금리가 30%를 훌쩍 넘어서면서 30대 재벌그룹 가운데 절반이 나가떨어졌다. 살을 에는 혹독한 금융개혁도 강요당했다. 수많은 은행원이 거리로 밀려났고 수많은 은행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다. 긴축과 구조조정을 함께하라는, 미국의 무자비한 주문을 따른 대가였다.

그러나 정작 미국 자신은 다르다. 미국은 경제위기를 맞자 우리에게 가르쳤던 정책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우리에겐 초긴축을 강요했지만 자신은 초확장 정책을 펴고 있다. 재정긴축은커녕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 예산을 편성했다. 고금리 대신 제로금리에 돈도 마구 찍어내고 있다.

이뿐인가. 구조조정도 ‘모르쇠’다. 부실 금융기관 퇴출은 없고 지원 일변도다. 그냥 놔뒀더라면 진작 망했을 씨티은행과 AIG도 계속 끌어안고 간다. GM과 크라이슬러 같은 거대 부실 기업도 살리려고 안간힘이다.

하긴 미국만 그런 건 아니다. 다른 선진국들도 ‘표변’해 한결같이 금리 인하와 재정 확대를 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시장 개방과 자유무역을 요구했던 그들이 지금은 보호주의로 확 돌았다. 강대국을 자처하는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언행이 불일치할 수 있는지. 상황이 다르면 해법도 다르다고 주장할 참인가. 그렇더라도 “(세금으로 부실 금융사를 구제하는 건) 심각한 경기위축과 일자리 감소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말에는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럴 요량이었으면 11년 전 말이나 하지 말든지.

11년 전 선(先)구조조정, 후(後)지원 방식은 옳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외환위기를 그렇게 빨리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완급 조절은 필요했다. 재정긴축 일변도보다는 급속한 경기침체와 이로 인한 성장 잠재력의 파괴를 줄이기 위한 확장 정책이 병행됐어야 했다. 하지만 부실을 신속하게 도려내는 과감한 구조조정은 맞았다. 부실 기업은 파산 또는 인수합병(M&A)시키고, 부실 경영의 책임자에게는 상응하는 책임을 물었던 건 정말 잘했다. 11년 전 한국이 했던 대로 미국이 했다면, 자신들이 가르쳐 준 정책을 자기에게도 적용했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격분하고 미 국민이 배신감을 느낀 AIG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국민 세금으로 보너스를 챙긴 AIG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는 그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 생긴 게 아니다.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은 채 지원만 해 준 미국 정부의 책임이다.

미국이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제2, 제3의 AIG 사태는 속출할 것이다. 한국이 11년 전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얻은 ‘다 살리려다가는 다 죽는다’는 교훈은 지금의 미국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한다. 자신들을 위기에서 속히 벗어나게 해 줄 정책이기도 하거니와 강대국의 풍모를 그나마 보존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해서다. 이는 MB 정부에도 적용돼야 할 교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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