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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아득바득 살지마, 인생은 외길이 아니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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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영두의 우연한 현실
이현 지음, 사계절, 212쪽, 9000원

『짜장면 불어요』『우리들의 스캔들』의 작가 이현이 처음으로 내놓은 청소년 소설집이다. 발랄한 문체와 의외의 반전 등 ‘이현’ 식 작법을 그대로 따른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렸다.

이야기 소재는 평이하다. 학교현장의 인권 침해, 10대의 왜곡된 성(性)의식, 부모와의 갈등, 자아정체성 고민 등 누구라도 생각해낼 법한 갈등 상황이다.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이 신선하다. 고민 투성이 현실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다. SF와 판타지 기법까지 동원해 인생이 외길이 아님을 설파한다. 고민의 무게를 덜어주고 삶의 시야를 넓혀주는 해법이다.

표제작 ‘영두의 우연한 현실’이 딱 그렇다.

고3인 주인공 영두. 내신 3등급에, 공부가 가장 걱정인 평범한 수험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두가 영두를 만난다. 동명이인이 아니라 동일한 존재다. 그 근거는 ‘다중우주 이론’이다. 우리가 뭔가를 선택할 때마다 그 경우의 수만큼 수많은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우주에는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다른 운명과 다른 결정 속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단다. 그러니까 영두가 만난 또 다른 영두는 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영두란 얘기다. 그런데 그 영두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누구를 후려갈길 때의 짜릿한 전율이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인 싸움꾼이었다.

두 우주의 두 영두가 우연히 한 공간에서 만나 벌어지는 해프닝이 퍽 흥미롭다. 그 우여곡절 사이사이엔 “현실은 허상”이라는 메시지가 숨어있다.

“우리는 그 허상에 내몰려서 살아가고 있는 거지. 우린 그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보려고, 혹은 거기서 벗어나 보려고 아득바득…웃기는 일이야.”(79쪽)

이밖에 소심한 여고생의 소심한 연애담을 담은 ‘어떤 실연’, 외계생명체를 따라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출하는 ‘로스웰주의보’, 청소년 인권 문제를 다룬 ‘오답 승리의 희망’ 등도 모두 현실 문제를 짚었다. ‘그가 남긴 것’은 부모·자식 사이의 화해 과정을 독특하게 그린 작품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어머니와 정아·정후 남매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독한 년!” 고모의 말에 정아는 발끈했다. “고모는 그렇게 슬픈가요? 그렇겠죠. 아버지가 고모네 아파트를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고모한테 빚을 남긴 것도 아니잖아요.”(170쪽) 그랬던 정아가 “아빠, 미안해”를 읊조릴 땐 덩달아 울컥해진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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