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왕국 탈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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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본 회사가 만든 반도체는 한때 전 세계시장의 80%를 차지했지만 1980년대 말엔 7%대로 급감했다. 적절한 투자 시기를 놓쳐 미국.한국.대만 업체에 주도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 반도체 회사가 '부활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금액 기준으로 시장 점유율이 20%를 넘어섰다. 또 세계적인 경기회복을 등에 없고 업체마다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투자 확대=일본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반도체 제조장비 시장은 전년보다 54% 늘면서 7년 만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시장으로 부상했다. 반도체 회사들이 생산시설을 늘리기 위해 투자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마쓰시타는 도쿄 인근 우오즈에 1300억엔을 들여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고, 세계 5위 업체인 도시바는 오이타와 오카이지 공장에 최첨단인 300㎜ 웨이퍼 라인을 증설하기 위해 내년까지 4000억엔을 투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후지쓰는 아키루노 기술센터의 생산량을 50%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99년 히타치와 NEC의 D램 부문이 결합한 엘피다는 5000억엔을 들여 히로시마에 세계 최대의 D램 공장을 건설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세계 반도체 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투자의 규모가 아니라 투자의 내용이다.

엘피다를 제외하고는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투자를 늘리는 부문은 D램 등 메모리 반도체가 아니라 비메모리 반도체다. 비메모리는 메모리에 비해 마진이 더 많을 뿐 아니라 디지털 가전이나 휴대전화 부문의 호황에 따라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특히 대량생산 체제를 갖춰야 하는 메모리와 달리 비메모리는 용도에 맞게 소량 다품종 생산이 가능해야만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이를 위해 도시바는 오이타 공장에 공정별로 필요한 기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고, 고객 요구에 따라 제품의 기능을 다양하게 변환할 수 있는 최신 설비를 시험가동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이 설비는 정부.기업.학계의 공동 프로젝트인 'HALCA 프로그램'의 연구결과다.

◆엇갈리는 전망=니혼게이자이는 "내년과 내후년에 예상되는 반도체 침체기를 견뎌낸다면 일본 반도체 업계는 완전한 회복 국면에 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생산과 판매가 모두 호조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앞으로 수개월간 설비 가동률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겠지만 내년에 업계가 초과 공급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있어 과도한 투자는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일본 국제대학 이케다 노부오 교수는 "최근 일본 전자업체가 디지털 가전 분야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80년대의 과도한 투자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며 "전자업체가 부실해질 경우 반도체 업체도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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