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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부활시키다-하

중앙일보

입력

스페인 독감은 언제든지 돌아 올 수 있다.

토벤버거 박사는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해서 알래스카 얼음 속에 묻힌 인디언으로부터 독감 바이러스를 부활시켰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재생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제프리 토벤버거 박사는 “자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연에서는 항상 변이가 일어나며, 인간의 면역체계를 무력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문은 또 생긴다. 그러면 하등생물의 진화는 왜 그렇게 빨리 진행되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바이러스도 생존을 위해 부단한 혁신을 하고 있다는 거다. 과학을 앞세운 페니실린과 항생제와 같은 인간의 ‘잔인한’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다.

혁신은 개인, 기업, 그리고 국가만이 추구하는 명제가 아니다. 진화가 혁신이고, 혁신 또한 진화다. 찰스 다윈의 주장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연현상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진리다.

더러운 질병에는 미워하는 나라 이름이 붙어

그런데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 것일까? 전통적으로 더러운 질병의 이름은 보통 그 병을 전파한 지역이나 나라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 나라에 대한 적개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는 페스트를 징기스칸의 몽고가 옮긴 질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유럽을 휩쓴 아시아 몽고에 대한 증오가 깔려 있다. 이에 대해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들이 우습게 생각했으며 한동안 식민지나 다름 없었던 아시아에 크게 다친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또한 성병 임질도 잔인한 몽고 침략자들이 옮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매독을 ‘프렌치 디지즈’(French Disease)라고 부른다. 프랑스가 한때 전쟁을 일으켜 이탈리아를 공격했고 수많은 여자를 강간하고 성접촉을 통해 퍼트린 병이라는 것이다.

조류독감의 진원지는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많은 학자들이 아시아에서 발생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고 진원지를 중국의 남부 광둥(廣東)성으로 지목한다. 이곳에서는 가축과 인간과의 개념이 따로 없다. 개나 돼지, 닭 등이 인간과 함께 생활한다. 당연히 닭과 접촉이 많아지고, 닭이 갖고 있는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염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확실치 않다. 질병의 진원지를 지목하는 경우 대부분 그 진원지 국가를 못마땅해서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

에이즈의 진원지를 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아프리카 원숭이에서도 에이즈바이러스가 발견됐다. 그러나 인간에게 직접 전염되는 바이러스는 아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원숭이와 수간(獸奸)을 하는 과정에서 원숭이 에이즈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주장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론으로 생각됐다. 좋은 뜻으로 생각하면 인류의 발상지가 아프리카라는 뜻도 된다. 그러나 나쁘게 생각하면 아프리카를 에이즈를 퍼트린 악의 축으로 생각하려는 의도도 된다.

독감을 보도한 스페인 방송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 돼

그러면 스페인 독감은 어떠한가?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스페인은 정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 최근 조류독감이 스페인 독감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일자 스페인 당국은 UN보건당국에다 앞으로 ‘스페인 독감’이라는 말을 쓰지 말 것을 공식 요청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1차 대전은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스페인은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스페인은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방역과 구제사업에 충실할 수 있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은 바로 스페인 방송이었다. 대부분 방송들은 전시체제여서 정확한 보도를 하지 않았다. 대부분 국가의 언론통제가 심했지만 스페인 방송은 예외였다. 전쟁상황을 정확하게 보도했다.

스페인 방송들은 당시 유럽을 강타한 독감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심한 폐렴을 동반한 독감으로 쓰러지고, 시체가 되고 있는 동료들이 바로 스페인 방송이 보도한 독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군인들은 이 독감을 스페인 독감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이 이름으로 고정돼 버렸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거주했던 한 영국 선교사가 스페인의 의학 학술지인 자마(JAMA)에 실린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무려 740만 명이 독감에 감염돼 14만 명이 사망했다는 것.

우리나라 740만 명 걸려, 14만 명 사망

스페인 독감은 미국도 강타했다. 1918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적십자사 요원들이 환자들을 구급차에 싣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가 당시에 발생한 독감과 스페인 독감과의 정확한 관련성을 밝혀내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독감 환자를 몸소 치료했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박사는 스페인 의학 학술지에 이 보고서를 내면서 한국의 독감과 스페인 독감의 유사성에 무게를 둔 것은 사실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 예방접종관리팀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역대 질병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가 현재 없고 당시 백신이 없었던 시절 독감은 치사율이 높은 질병이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물론 당시 한국은 세균학에 대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독감은 해마다 가을과 겨울철 4~5개월간 성행해 노약자와 어린이들의 목숨을 많이 빼앗아 간 전염병인 것만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국립보건연구소의 한 관계자도 “당시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적으로 퍼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시아 특히 일본과 한국은 다소 안전했던 지역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의학수준이 높았던 일본을 비롯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독감이 스페인 독감이든 아니든 간에 사회적인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유럽의 독감과 아주 비슷해”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징기스칸의 몽고군인들이 옮겼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한편 자마 학술지에 ‘특별한 고찰이 필요한 한국의 유행성 독감(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A4용지 9매 분량의 이 연구 리포트는 “1918년 9월 한국에 첫 모습을 드러낸 유해성이 대단한 이 독감은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에서 전파된 전염병이라는 데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라는 말로 첫 문장을 시작했다.

“이 병은 북에서 남으로 남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급격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전염병을 접하게 된 것은 9월 말로 10월 중순 감염자와 희생자 수가 최고에 달했다. 조선인들의 비위생적인 생활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아마 한국 전체인구의 4분의 1 내지 반수가 이 병에 감염됐으며 학교를 비롯해 많은 관공서가 문을 닫았다. 왜냐하면 선생들이 독감에 걸려 수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당국에 병의 규모나 희생자 수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이 독감의 증상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독감에 걸린 사람은 열이 급작스럽게 오른다. 열이 104-105도(화씨)가 된다. 24시간이 지나 열이 정상적으로 내린 사람은 생존하지만 기관지염이나 폐렴을 동반하게 되면 많이 죽는다. 치사율이 대단하다”

시기적으로나 전염속도는 비슷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가지 실험에서 한국의 독감이 스페인 독감과 같다는 결정적 단서는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다만 급속한 전염속도나 치사율 등을 고려하고, 또 타이밍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이 높다는 심증이 많이 갔다는 것이다. 당시 스페인 독감이 조류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했다는 주장은 거의 없었던 시기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독감과 스페인 독감에 주로 나타나는 파이퍼 바실러스(Pfeiffer Bachilus)와의 관련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 원인 규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또 보체고정(Complement Fixation), 혈청진단법(Agglutination Test), 피부 시험(Skin Test)을 비롯해 검역방법(Animal Inoculation) 등 여러 가지 시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제한적인 연구’로 정확한 결론을 도출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그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한국의 독감 원인을 규명할 수 없으며, 한국의 독감과 파이퍼 바실러스와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증거수집이 필요하다. 또한 환자의 혈액(filtered blood)과 분비물(secretion)에 대해 더 많은 실험들이 선행돼야 한다.”

스코필드 박사는 누구?

스코필드 박사(한국이름, 石好必)는 1888년 영국에서 태어나 19살 되던 해에 캐나다로 건너 가서 토론토 대학에서 수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19년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가 됐다. 그는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이었지만 3.1운동이 발발하자 일본의 탄압상을 사진으로 찍어 세계 언론에 보내는 등 한국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82세 되던 해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립 후 그는 한국의 부정부패 척결을 자주 외치면서 이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우는 국민이 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의 지적처럼 “인간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그야말로 바이러스와의 끊임 없는 투쟁”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희생된 환자의 독감 바이러스를 재생시킨 것을 보면 우리는 언제나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스페인 독감뿐만이 아니다. 치명적인 질병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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