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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시장 헤집기] 차별의 벽 쌓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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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호 39면

천년고도 경주에선 햄버거 사먹을 생각일랑 아예 버려라. 일식·양식·중식도 안 된다. 한식, 그것도 경주의 향토음식만 먹어라∼. 정색을 하고 이런 말을 한다면 아마도 큰 웃음거리가 될 거다.

그런데 이를 당당하게 법으로 정해둔 곳이 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역사 도시 루카가 그렇다. 지난 1월 이곳의 시의회는 유적지가 많은 구시가지에서 에스닉푸드(이국음식) 레스토랑의 신설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미 영업 중인 곳은 그대로 놔뒀지만 이탈리아 음식 한두 가지를 끼워 팔도록 했다. 명분은 전통과 정체성의 보존이다.

루카 시의회는 에스닉푸드를 ‘이탈리아 음식이 아닌 것’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이탈리아 음식이란 루카의 전통 음식이다. 지중해풍의 시칠리아 음식도 규제 대상이다. 프렌치 레스토랑만 예외로 봐줬다. 요리에 콧대가 높은 프랑스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진 않겠다는 뜻일까.

허가가 묶인 것은 터키 케밥집, 인도 카레집, 태국 음식점, 중국 식당 등이다. 주로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업소다. 뭔가 의도가 있어 보이지 않나. 이민자들에 대한 ‘벽 쌓기’의 냄새가 나지 않나.

루카에 이어 밀라노도 외국 음식점 규제를 추진하고 있다. 케밥집이 타깃이다. 냄새 나고 지저분해 아름다운 경관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맛있고 값싼 게 죄라면 죄다. 케밥 때문에 전통 이탈리아 레스토랑들이 맥을 못 쓴다고 하니 말이다.

이에 대해선 이탈리아 안에서도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전통음식을 빙자한 인종차별이라는 지적이 많다. 사실 음식을 두고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것 자체가 치졸하지 않나. 이탈리아 음식에 빼놓을 수 없는 토마토는 16세기 남미에서 전파된 것이다. 스파게티도 중국의 국수 문화가 전해져 생겨났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엔 음식에서도 퓨전(융합)이 대세 아닌가.

그런데도 루카의 시의원들은 ‘내 고장 음식을 먹자는 게 뭐가 문제냐’는 투다. 그러나 전통 음식을 먹자는 것과 외국 음식점의 영업을 금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전자는 경쟁을 인정하지만, 후자는 경쟁을 봉쇄한다.

하기야 시장원리에 눈을 감는 사례가 어디 이뿐인가. 미국은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회사들의 외국인 고용을 제한할 태세다. 이미 월가에선 경영학석사학위(MBA)를 지닌 외국인 고용 계획이 취소되고 있다. 월가에 활발히 진출하던 인도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고 한다. 인도에선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을 정도다. 사회간접자본 프로젝트에 미국산 철강제품을 써야 한다는 ‘바이 아메리칸’ 조항 못지않은 차별적 규제다.

‘개방과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말이 찬송가처럼 암송되던 게 바로 엊그제였다. 지금은 어떤가. 여기저기서 차별의 칸막이가 드리워지며 각박한 밥그릇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이 온통 궁색하고 어려워서일까. 그럼 할 수 없다. 당분간 형편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으니, 루카에 가면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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