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호랑이 할아버지'와 카네이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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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몇년전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아주 무섭고 멀게만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됐을 때 할아버지는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이제는 건강을 많이 회복하셨지만 중풍과 싸우시느라 기력이 다하신 것일까? 요즘은 옛날의 엄격하고 대쪽같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체격도 많이 왜소해졌다.

할아버지께서는 방학이나 명절에 찾아가면 무척 기뻐하시고 우리 3남매를 아껴주셨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 할아버지댁을 찾아간 우리 남매는 할아버지댁에서 가까운 냇가에서 물싸움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아이스크림 3개를 사들고 오셔서 우리에게 주셨다.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어렸던 나는 할아버지께서 먹을 것을 사들고 오신 것이 좋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행동이었다.

할아버지는 이젠 나에게 더 이상 무섭고 엄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해 어버이날을 맞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카네이션에 내 이름을 써서 할아버지께 보내드렸다.

어버이날 아침에 할아버지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했다.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다음 어버이날에도 카네이션을 보내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바빴는지 이를 지키지 못했다.

이미 늙으신 탓일까? 할아버지는 가끔 내가 보기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늙으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무척 아프다.

그렇지만 마을 이장으로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곧은 성품으로 마을 대소사를 챙기셨던 할아버지를 나는 아직까지도 존경한다.

오늘따라 왜 엄격하셨던 할아버지의 옛날 모습이 그리운지 모르겠다.

민수진〈서울광진구중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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