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욕구 찾기 위해 눈동자 흔들림까지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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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 직원들이 달리룸에서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여의도 LG타워 30층엔 낯선 공간이 있다. 75㎡ 규모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국내 대기업에선 보기 드문 곳이다. 여기저기 풍선이 매달려 있고 ‘Time & Agenda’ ‘Go for quantity’라는 구호가 나붙어 있다. 한쪽 벽을 절반 이상 채운 형형색색의 포스트 잇(post it)도 눈길을 끈다. 이곳에선 대체 무엇을 할까?

Dali룸 “아이디어 생산공장” … LG전자 히트제품 원동력 고객 욕구 탐구
통찰경영- LG트윈타워 30층 Dali룸에선 무슨 일이…

이 방의 명칭은 ‘달리(Dali)’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이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작가다. 눈에 보이는 물체를 2중·3중으로 묘사하는 게 그의 특징이다. 말(馬)을 여인의 나체로 그리는 식이다. 남다른 창의력·상상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살바도르 달리를 알면 이 방의 성격을 금세 눈치 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곳은 아이디어를 만드는 공간이다. 이를테면 아이디어 생산공장이다. 여기선 어떤 아이디어든 대환영이다. 남들이 ‘저건 뭐야’라며 핀잔을 줘도 상관없다. LG전자 인사이트 마케팅팀(Insight Marketing) 최명화 상무는 “우리는 아이디어의 질보단 양을 중요시한다”며 “수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히트작이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달리룸에 풍선을 달아 놓고, 이곳을 신발을 벗는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것도 이런 이유다.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해 창의력을 한껏 발산시키겠다는 의도다. 수많은 포스트 잇이 붙어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중요한 아이디어를 그때그때 빠짐없이 기록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뿌리 없는 아이디어는 속 빈 강정과 다를 게 없다.

소비자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아이디어는 존재 가치가 없다. 이 때문에 달리룸에서 진행되는 아이디어 회의에선 무엇보다 소비자 욕구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사례를 보자. 3월 2일 오후 4시 달리룸, 20여 명의 LG전자 직원이 그룹별로 무언가를 숙의하고 있다. 주제는 ‘21세기에 걸맞은 ○○제품은 무엇일까’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R&D·판매·디자인 등 각기 다른 부서 직원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디어가 각양각색이고 충돌하기 일쑤다. 가령 제아무리 디자인이 화려해도, 판매가 수월치 않으면 곧바로 충돌이다. 이런 부딪침은 긍정적이다. 허울뿐인 아이디어를 미연에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룸에서 만난 LG전자 김영철 C&C팀 차장은 “기존 아이디어 회의는 주로 부서 사람들끼리 했다”며 “그러다 보니 탁상공론에 그쳐 제품화되지 않은 사례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김 차장은 이어 “하지만 달리룸에서 진행되는 아이디어 회의는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될 뿐 아니라 다른 부서 사람들의 의견도 들을 수 있어 효율적이다”고 전했다.

“살바도르 달리의 창의력 배워라”

하지만 이 회의에선 반드시 지켜야 할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있다. 소비자의 욕구를 반영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탈락이다. 그래서 회의 참석자들은 ○○제품에 대한 ‘소비자 욕구 현지조사 결과’를 꼼꼼하게 검토해야 한다. 소비자 욕구가 아이디어의 밑거름이라는 얘기다. LG전자 인사이트 마케팅팀 박미영 책임연구원은 “달리룸에서 진행되는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왜(Why)다”며 “현지조사 결과, 왜 이 제품이 필요하다고 나타났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소비자 욕구가 제대로 반영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달리룸이 만들어진 것은 올해다. 이곳을 운영하는 부서는 2007년 신설된 인사이트 마케팅팀이다. 팀원은 4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국내외 소비자의 욕구를 현지 조사한다. 이를 바탕으로 아이디어 및 제품 컨셉트 구축 과정에도 관여한다. 이를테면 소비자 욕구를 면밀히 탐구해 여기에 걸맞은 제품 컨셉트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이는 “통찰력을 발휘해 고객의 숨은 욕구를 찾아내야 한다”는 남용 부회장의 통찰경영론과 일맥상통한다. 남 부회장은 인사이트 마케팅팀의 수장 최명화 상무를 영입한 주인공이다. 특히 이들의 국내외 소비자 욕구 조사는 치밀하고 꼼꼼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한 가정에 (허가를 받아) 카메라를 설치하고 소비자의 행동과 버릇을 24시간 관찰하는 것은 예사다.

가령 냉장고의 경우 문을 몇 번 여는지 냉동실·냉장실 중 어디를 많이 사용하는지를 분석한다. 특정 숍에 카메라를 설치해 소비자의 눈길이 가장 많이 쏠리는 제품도 솎아낸다. 일종의 동공 분석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사이트 마케팅팀이 소비자 욕구 파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인사이트 마케팅팀의 활동은 LG전자가 수많은 히트상품을 내놓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출시 5개월 만에 25만 대 이상 판매된 LG전자의 와인폰은 “3040세대가 보고, 듣고, 누르기 쉬운 휴대전화를 선호한다”는 인사이트 마케팅팀의 분석이 맞아떨어진 예다. 와인폰과 후속작 와인폰2는 올 2월 현재 140만 대 이상 판매됐다.

LG전자가 지난해 출시한 풀터치폰 ‘쿠키’가 중국과 유럽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최명화 상무는 “인사이트 마케팅팀을 현지에 보내, 중국 젊은 층이 어떤 휴대폰을 원하는지 철저하게 조사했다”며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달리룸에서 수차례 회의를 거듭한 결과, 저렴한 풀터치폰이 중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소비자 욕구 짚어 히트작 줄줄이

휴대폰뿐 아니다. 신세대 주부층의 호응을 이끌어내 한 달 판매량이 3000대에 육박하는 데스크노트(노트북+데스크톱) ‘엑스노트 S900’은 고객 욕구를 상품기획단계에서 반영한 제품이다. 지난해 5월 나이지리아 라고스 소재 LG 직영매장에서 출시된 부족언어 지원 TV도 같은 맥락이다. 나이지리아는 교육수준이 높지 않아 공용어인 영어를 비롯해 주요 3대 부족어인 이보·요르바·하우사를 사용한다.

그래서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부족어에 대한 자긍심이 남다르다. LG전자는 이런 고객 욕구를 오랜 조사 끝에 찾아내 3대 부족어가 지원되는 TV를 공급했고,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소비자 욕구를 찾아내 히트제품을 출시한 좋은 예다. LG전자는 지난해 사상 최대의 경영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액(49조3330억원), 영업이익(2조1331억원) 모두 사상 최대다.

휴대폰 사업은 단연 돋보였다. 판매량(1억70만 대), 매출액(14조5557억원), 영업이익(1조6043억원), 영업이익률(11%)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LG전자의 성공, 그냥 이룬 게 아니다. 그 이면엔 소비자의 욕구를 찾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숨어 있다.

LG전자의 고객 마음 파악하기

□ 2007년 인사이트 마케팅팀 신설해 소비자 욕구 파악 주력
□ 아이디어 교류 공간 Dali룸 만들어 다양한 의견 교류
□ 동공 분석 등 소비자 욕구 조사는 치밀하게 실시

소비자 욕구 반영한 제품 출시

□ 나이지리아 부족언어 지원 가능한 TV 수출
부족어 자긍심 자극해 인기몰이
□ 3040세대 겨냥한 와인폰, 와인폰2 출시
2월 현재 140만 대 이상 팔려
□ 저렴한 풀터치폰 출시해 중국·유럽 홀려
2월 현재 130만 대 판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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