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 바둑 북경 8강전 관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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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세계 바둑계에서 이창호9단이 호랑이라면 일본의 히코사카 나오토 (彦坂直人) 9단은 토끼 정도에 해당한다.

李9단은 전력을 기울여 토끼를 잡았는데 그 과정은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이었다.

19일 베이징 (北京) 쿤룬 (崑崙) 호텔에서 열린 제2회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전 8강전. 세계 최대 대회답게 중국 현지의 열기는 대단했다.

인민일보.신화통신등 수많은 언론사가 몰려들었고 중국중앙텔레비전 (CCTV) 는 전국 생중계에 나섰다.

전날 저녁의 전야제에서 관심의 표적이 된 李9단은 "히코사카9단을 연구해왔다" 며 만반의 준비가 돼있음을 밝히고는 취재진과 팬들의 사인공세를 피해 일찌감치 방으로 사라졌다.

李9단은 처음 만난 상대에게 잘 진다.

해외대국에 약한 징크스도 완전히 털어버리지 못했다.

그점을 잘 아는 李9단은 사람들이 자신의 8대2 우세를 점쳤음에도 결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대국은 처음부터 재미없이 흘러갔다.

黑을 쥔 35세의 히코사카는 이 판에 자신의 운명이라도 건 사람처럼 비장한 모습으로 이창호의 묵직한 칼날을 받아내더니 중반에 돌연 강수를 던지며 앞서기 시작했다.

이창호는 어차피 이길 것이라 믿고 있었으므로 조훈현9단.양재호9단등 한국측 기사들은 유창혁9단 - 마샤오춘 (馬曉春) 9단전이나 김승준 - 창하오 (常昊) 8단전만 연구하고 있었다.

녜웨이핑 (섭衛平) 9단등 수많은 프로들이 몰려든 중국측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후4시가 넘어 국면이 종반에 접어들었음에도 이창호9단의 형세는 비관적이었고 사태는 오히려 점점 나빠져 가고 있었다.

얼핏 이창호 판을 살핀 曺9단이 "이상하다" 고 놀란 얼굴을 했다.

침착하게 돌다리를 두드리는 특유의 행마 대신 李9단은 거칠고 저돌적인 수를 던지며 있는 힘을 다해 상대를 흔들고 있었다.

이것이 이창호의 비세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성재4단 -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覺) 9단전은 이미 끝났다.

얼마전만 해도 일본의 1인자였던 노련한 고바야시의 반면운영에 밀려 20세의 신예 李4단이 끝내 2집 반을 진 것이다.

그래도 李4단은 이번 대회에서 1, 2차 예선을 거쳐 세계 32강에 들었고 여기서도 2연승을 거뒀다.

본선 첫판에 탈락한 외삼촌 조치훈9단 대신 세계 8강까지 진입해 가문의 명예도 지켰다.

그는 할만큼 했다.

유창혁 - 마샤오춘전은 큰 승부에 강한 劉9단이 배짱 좋게 대세력을 펼치며 馬9단의 실리전법을 앞서나갔다.

중앙에 어마어마한 집이 마련되면서 劉9단의 승리가 임박한듯 보였다.

바로 이때 사고가 났다.

馬9단이 초반에 숨겨둔 노림수는 요원해 보였으나 어느덧 무르익어 시한폭탄처럼 터지면서 형세는 급전직하로 역전돼버린 것이다.

한.중 신예 대항전 성격의 김승준 (24) - 창하오 (21) 전은 시종 엄청난 패기의 대결로 점철됐다.

'6소룡' 의 선두 창하오8단은 올해 마샤오춘을 제치고 중국 랭킹 1위로 올라섰고 이 대회 32강전에선 조훈현9단을 꺾어 중국 바둑계를 열광시켰다.

특히 고향인 상하이 (上海)에선 스포츠 스타들을 제치고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고 한다.

지난해 제대한 金5단은 너그러운 마음과 잘 생긴 모습으로 선.후배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 지난해 LG배에서도 8강까지 올랐으나 국제무대에선 아직 낯선 존재다.

처음엔 黑을 쥔 金5단이 우세했으나 창하오의 멋진 사석전법에 걸려 역전됐다.

이 장면을 지켜 본 홍태선7단이 문득 "이러다 다 지는 것 아닐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

상황은 진정 심각했다.

劉9단은 이미 돌을 던졌으니 한국은 이때까지 2전2패. 이 판은 비록 난전이지만 金5단의 승산은 희박하기 그지없다.

만약 이창호9단까지 그대로 밀린다면 전멸이 아닌가.

金5단이 창하오의 실낱 같은 빈틈을 파고들어 대마를 잡으러 가면서 검토실의 분위기가 갑자기 호전되기 시작했다.

검토실에서 曺9단등이 대마 포획의 수순을 찾아냈다.

모니터 속에서 金5단은 이 수순을 단 한수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이리하여 김승준은 삼성화재배의 스타로 떠올랐다.

김승준의 승리가 신호였던듯 이창호 - 히코사카전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李9단의 유명한 종반 추격전이 불을 뿜기 시작하자 초읽기에 몰린 히코사카는 심금이 흔들린듯 거듭 실족하더니 4집반의 대차로 역전된 것이다.

국후의 4강전 추첨에서 마샤오춘은 또다시 천적 이창호와 만났다.

수많은 세계대회 결승 또는 준결승에서 그는 이창호와 만나 연전연패했고 이젠 李9단의 그림자만 봐도 놀라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그는 상하이 TV가 李9단과 만난소감을 묻자 "내가 49대51로 불리하다고 생각한다" 고 묘한 대답을 했다.

전야제때 "내일 유창혁9단을 꺾는다면 내가 우승할 것이다" 고 큰소리쳤던 것과 다른 얘기였다.

李9단의 대답은 훨씬 의젓했다.

"나에게 모든 승부는 5대5다.

당일의 기세가 승부를 좌우할 뿐이다.

" 한국은 기대했던 이창호와 신예 김승준의 활약에 힘입어 준결승전에 2명이 진출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李9단은 약간 우세하고 고바야시9단과 맞붙은 金5단은 약간 불리하다.

그러나 李9단의 말대로 승부는 당일의 기세가 좌우하는 것. 우승상금 3억원의 삼성화재배 준결승전은 10월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다.

북경 =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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