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 기획사 달라지는 계약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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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연예인과 기획사간의 속칭 '노예 계약'이 잇따라 철퇴를 맞고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기획사 파워엠엔터테인먼트에게 배우 김윤진과 맺은 계약서 약관 중 일부를 고치라고 명령했다. '어디에 있든 자기 위치를 통보한다''의무 조항 위반땐 계약금의 3배를 문다'는 등의 조항이 이에 해당한다.

지난 4월 서울 고법이 SM엔터테인먼트와 가수 문희준씨의 계약 관련 소송에서 문씨의 손을 들어준 데 이어 나온 결정이다. 그동안 연예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적용돼 온 계약이 여론과 법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사협정'을 맺고 새 수익 모델로 메니지먼트를 산업화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노예 계약 왜 생겼나='노예 계약'이 묵인된 건 기획사의 난립 때문이다. 연예계로 돈이 몰리면서 기획사도 몰린 것이다. 현재 매니지먼트 기획사는 대충만 세도 1000개가 넘는다. 매니저 한 사람이 운영하는 1인 기획사도 많아 정확한 수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모 기획사 대표는 "연간 5000만~1억원씩 들여 기껏 신인을 키워놓으면 다른 기획사가 접근해 더 많은 계약금과 수익 배분율을 제시해 이들을 빼가기 일쑤"라면서 "위약금을 비상식적으로 높여놓은 건 이런 풍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이비 기획사의 난립도 영향을 미쳤다. 너도 나도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는 붐을 타고 '길거리 캐스팅'이라며 접근해 계약서로 묶어둔 뒤 "데뷔하려면 돈을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가짜 기획사들이 멀쩡한 기획사의 얼굴에까지 먹물을 뿌렸다는 것이다.

◇'클린 계약서' 만든다=플럭서스 뮤직의 김진석 실장은 "과거 댄스 가수가 난립하던 시절에는 10년, 길게는 종신 계약까지 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플럭서스 뮤직, 팬엔터테인먼트 등 계약서를 쓸 때 고문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하는 기획사도 늘고 있다. 연예기획사 엠보트는 가수가 앨범을 내기 전까지는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엠보트 관계자는 "가수와 회사간에 신뢰가 쌓일 때 까지 서로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위 '노예 계약'은 신인 가수를 발탁한 시점에 장기 계약부터 맺은 뒤 계약 위반시 훈련 비용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위약금을 물도록 해 문제가 됐었다.

◇세지는 연예인 파워=노예 계약까지는 아니더라도 연예인에게 상당히 불리하던 계약 관행도 시정되고 있다. 연예인 매니저 김모(34)씨는 "기획사의 권리만 나열하던 약관에 연예인의 권리도 비슷한 수만큼 포함되고 있다. 많게는 10배 이상을 물게 하던 위약금도 대개 2배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씨는 "잇따른 기획사의 패소로 공정한 계약에 대한 교육이 저절로 이뤄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조광희 변호사는 "위약금을 무리하게 책정하더라도 법원에서는 2배 이상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비용을 공정하게 산출하는 등 연예인과 기획사가 서로 믿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생 기획사의 경우 노예 계약은 커녕 무료로 매니지먼트를 해 주는 조건으로 이름 있는 연예인을 끌어오기도 한다. 배용준.보아 등 대형 스타들의 경우 새 드라마 촬영, 새 앨범 발매 소식에도 소속 기획사의 주가가 오르내린다. 그 만큼 연예인의 상품성이 높아지면서 연예인의 힘도 커졌다는 말이다.

◇출연료만으로는 한계=연예 기획사가 소속 연예인의 수입에 따른 커미션을 받는 수익 구조로만 운영되는 것도 문제의 원인이다. 연예기획사 싸이더스 HQ는 최근 영화 제작사 아이필름을 설립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가 그 첫 작품. 자체적으로 자본을 끌어와 전지현.장혁 등 자사 소속 연예인을 대거 출연시켜 완성했다. 이런 식으로 제작될 영화가 5~6편이 대기 중이다.

이 방식이 충무로에서 환영받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한 영화사 대표는 "가뜩이나 배우 기근이 심한 한국영화계에서 자사 소속 연예인을 틀어쥐고 있으면 시장이 왜곡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연예기획사의 새로운 수익 모델을 제시한 건 사실이다.

이영기.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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