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독특한 혁명가인 호찌민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조국의 생존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 공산당 지도부는 이따금씩 호찌민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의심했다. 역사학자 윌리엄 듀이커는'호찌민 평전'에서 호가 민족주의자이면서 공산주의자였다고 평가한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가능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이상을 현재의 조건에 맞추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실용주의자였다. 호에게 최선은 종종 선(善)의 적(敵)이 될 수 있었다. 60년대 그의 가장 완강한 적수였던 린든 존슨조차 종종 자신이 '호찌민 노인네'하고 단둘이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타협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듀이커는 호찌민이 반(半)은 레닌이었고 반은 간디였다고 말한다. 빈틈없는 전략가이자 재능 있는 조직가이면서 구도자의 소박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다.
정확히 30년 전인 75년 4월 30일 당시 남(南)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이 함락됐다. 지금의 호찌민시(市)다. 공산주의의 도미노 현상을 막겠다며 베트남에 들어간 미국이 사상 첫 패배의 아픔을 당한 날이다. 호찌민이 사망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미국이 반(反)테러를 외치며 점령하고 있는 이라크가 제2의 베트남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적지 않다. 미국과 이라크 모두 호찌민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을 것 같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