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쑨원도 장제스도 혀 내두른 ‘퍼스트레이디의 강짜’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03호 34면

1942년 중앙군관학교를 방문한 천비쥔(왼쪽). 왕징웨이는 당시 난징국민정부 주석이었다. 김명호 제공

말레이시아 페낭에 천(陳)씨 성을 가진 화교 거상이 있었다. 혁명을 지지했다. 쑨원(孫文)에게 돈을 송금하면 쑨은 일본에서 발행하던 동맹회(同盟會) 기관지 민보(民報)를 보내주곤 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102> 왕징웨이와 천비쥔

어린 딸 비쥔(璧君)은 민보를 읽으며 모국어를 깨우쳤다. 왕징웨이(汪精衛)의 글을 좋아했다. 그의 글을 볼 때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페낭에 동맹회 지부가 설립되자 가입했다. 회원 중 가장 어렸다. 17세 때 왕징웨이가 페낭에 왔다. 만나 보니 25세의 청년이었다. “적당한 체구에 칠흑 같은 눈썹과 두 눈은 신화 속에나 나오는 사람 같았다. 흰 양복과 분홍빛 넥타이도 비범한 용모에 잘 어울렸다”고 일기에 적었다. 사귀자는 편지를 보냈지만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도학선생(道學先生)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술·도박·여자를 멀리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혁명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도 들었다. 혁명인지 뭔지가 빨리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저절로 된다면 모를까 일을 제대로 할 사람들 같지가 않아 좀 불안했다.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돌아가자 천비쥔도 일본 유학을 떠났다. 부모가 정해준 약혼자에게는 적당히 몇 자 적어 보냈다. 민보에서 편집 일을 했다.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민보 살림까지 꾸려 나갔다. 왕이 암살단을 조직한다는 말을 듣자 참가를 자청했다. 유도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검술과 창 쓰는 법을 배웠다. 폭약 제조법도 익혔다. 폭탄을 베이징까지 운반한 것도 천비쥔이었다. 암살 대상은 황제의 생부인 섭정왕이라고 들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폭탄을 가설하는 바람에 암살은 실패했다. 왕징웨이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천은 구명을 위해 베이징·페낭·일본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간수들을 매수해 먹을 것을 부지런히 들여보냈다. 왕징웨이는 껍질에 작은 글씨로 ‘비(璧)’라고 쓰인 삶은 계란을 먹을 때마다 창문을 바라보곤 했다. “하늘이 손바닥만 했다. 비쥔과 함께 넓은 하늘을 보고 싶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왕징웨이는 출옥했다. 이듬해 봄 천비쥔과 결혼했다. 거절했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신랑은 스물여덟, 신부는 스무 살이었다.

천비쥔은 중국 최고의 미남에 쑨원의 후계자이며 대논객인 왕징웨이의 부인 노릇 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단속과 관리와 간섭을 엄하게 하다 보니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왕이 몰래 만나는 여자를 자살할 때까지 따라다니며 망신을 줬다. 왕징웨이도 놀라고 쑨원도 놀라고 다들 놀랐다. 왕징웨이가 난징(南京)정부 주석을 할 때 천비쥔은 주로 광둥에 있었다. 왕이 배우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한 여배우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주석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자리를 주선한 외교부장의 뺨을 후려갈겼다. 동생과 친조카들을 비서로 들어앉히며 사소한 일도 보고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참다 못한 왕징웨이가 이혼하자는 말을 한 다음부터 여자 문제는 모른 체했다. 대신 재물을 탐하고 관리 임용을 멋대로 했다. 툭하면 군관 학교를 방문해 장시간 훈화를 했다.

장제스(蔣介石)도 천비쥔이라면 쩔쩔맸다. 남편과 밥 먹으며 다퉜다는 말을 듣자 장의 집무실에 달려가 집기들을 내동댕이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후로 장제스는 가급적이면 왕징웨이를 피했다. 두 사람은 비록 정적이었지만 적당히 긴장을 유지하던 사이였다. 왕징웨이가 장제스와 결별해 일본의 괴뢰로 전락하기까지에는 천의 성격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비록 사각지대에 있었지만 쑹메이링·장칭·왕광메이처럼 천비쥔도 한때는 중국의 퍼스트레이디 중 한 사람이었다.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으로 부활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