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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강도들을 떨게 했던 ‘표국 무사’ 왕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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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06면

실존했던 황비홍(1847년생)보다 두 살 많았던 왕오(王五)는 베이징(北京)에서 이름을 떨쳤던 무술인이다. 황비홍이 광둥(廣東)을 중심으로 한 중국 남부에서 이름이 높았다면, 왕오는 북부지역의 숱한 주먹들 사이에서 호걸로 통했다.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문화 - 武 2

그의 직업은 고객의 재물을 운반해 주는 경비업체의 주인. 그가 베이징에서 운영한 회사 이름이 순창표국이다. 표국이란 말은 무협지를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제법 익숙하리라. 사람과 재물의 안전을 지켜 주는 직업이다.

최근 중국 허베이(河北)성에서 발생했던 집단 난투극은 한족(漢族)과 회족(回族)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회족은 특히 강인한 체력으로 무술계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왕오도 허베이성의 회족 출신이다. 그는 고향에서 무예를 연마한 뒤 서른 즈음에 베이징에 표국을 차렸다.

순창표국에서 근무했던 무술인은 34명. 대부분 상대를 일시에 무력화하는 빼어난 무예를 한 가지 이상씩 지니고 있었지만 왕오는 그중에서도 가장 무술 실력이 앞섰다.
그의 회사가 책임지는 지역은 중국 전역에 이르렀다. 특히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중심으로 그의 재물 운송 사업이 번창했다. 재물을 싣는 수레에 ‘순창표국’이라 적힌 깃발을 꽂는 것만으로도 운송 작업이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만큼 중국 곳곳의 ‘도적’과 ‘강도’들에게 왕오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칼 쓰는 솜씨가 워낙 빼어나 별명이 ‘대도(大刀) 왕오’였다. 전국 각 지역의 무림과 적극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그는 쓰러져 가는 청 왕조를 개혁하기 위해 젊은 유생들이 일으켰던 ‘변법유신(變法維新)’ 운동의 멤버들과도 교분을 맺었다. 특히 변법운동을 주도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담사동(譚嗣同)에게는 무술 스승이었다.

그 역시 1900년 베이징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8국 연합군의 행패에 항거해 칼을 뽑았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것으로 일생을 마친다. 회사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은 나중에 이를 사람이 자신의 당나귀와 노새를 데리고 함께 묵을 수 있는 여관으로 바꿨다는 후문이다.

왕오가 이런 사업을 벌여 이름을 드높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표국은 지금 중국에서 그 명맥을 제대로 잇고 있지는 못하지만 과거 왕조 시절에는 곳곳에서 호황을 누렸던 업종이다. 재물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과정에 반드시 이 표국이 따라야 했다면 그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중국 사회에는 일찍이 ‘토비(土匪)’라는 존재가 횡행했다. 도적의 활동이 많았기에 표국이 성업을 이뤘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 요즘의 중국에서도 길을 지나가는 버스를 통째로 털어 버리는 ‘노패(路覇)’가 등장한다. 대만 노인 관광객 24명의 금품을 턴 뒤 배 안에 이들을 가두고 모두 불살라 살해한 사건(1994년 저장성 千島湖 사건)의 ‘호비(湖匪·호수의 도적)’도 있다.

도적이 어디 중국에만 있었으랴. 그러나 중국에서는 평범한 백성이 토비로 변신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청나라 때 한 지방관이 황제에게 올린 상주문에서 “낮에는 농민이었다가 밤에는 산으로 올라가 토비로 변신하는 사람들이 있어 당황스럽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통일 왕조의 중국은 강했다. 외형적인 힘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전제적 황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조는 끝없는 수탈을 자행했다. 더구나 서북과 동북의 유목 세력이 끊임없이 남하하면서 인구는 늘 이동했으며, 그런 와중에 내란이 벌어지거나 이동하는 인구 사이에 피비린내 풍기는 싸움이 벌어졌다.

먼저 정착한 인구와 새로 이동한 인구 사이의 싸움, 부패와 탐욕으로 일관한 왕조의 권력, 늘 이어지는 전쟁통 안에서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길은 자신의 세력을 다듬어 무력을 키우는 일이다. 이들은 산에서는 산비(山匪), 평원에서는 마적(馬賊) 또는 향비(響匪), 바다에서에는 해도(海盜), 호수에는 호비로 나타났다. 이들 존재는 어쩌면 생존을 위한 중국 민초들의 다른 선택일 수 있었다.

표국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은 중국의 인문적 환경이 만들어 낸 싸움의 DNA다. 감정을 앞세우다가 주먹질 한번 한 뒤 술 한잔 하면서 “없던 일로 하자”는 한국 싸움의 전통과 다툼을 피하지만 일단 붙으면 피를 보고야 마는 중국의 전통은 다르다.

1966년 중국을 휩쓸었던 문화혁명의 홍위병이 보인 처절한 난투극은 다 이런 배경을 지니고 있다. ‘만만디(느릿느릿)’의 인상으로 중국인을 파악하는 한국인의 얄팍한 지식은 이제 용도폐기해야 할 때다. 일반의 생각보다 중국인의 경쟁력은 훨씬 강하다. 그 무(武)의 전통을 다시 돌아볼 일이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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