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청진동, 몇 개의 풍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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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13면

이문구 작가에게 술은 소통이었다.

그 무렵 청진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문인들이 제일 즐겨 찾은 술집은 ‘가락지’라는 맥줏집이었다. 좌석도 100석 남짓한 데다가 소녀 티를 갓 벗어 낸 20대 초반의 예쁜 아가씨 7~8명이 유니폼을 입고 손님들 시중을 들어 문인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빈자리 없이 문인들로만 꽉 들어찬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한국문학’ 편집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해서 매일 문인들을 만나야 하는 이문구로서는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들어야 하는 최고 단골 고객일 수밖에 없었다.

이문구의 사람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가락지’에 이문구를 무척 따르던 한 아가씨가 있었다. M이라고 해 두자. M은 이문구를 결코 손님으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이문구를 바라보는 M의 시선에는 그립달까 애처롭달까 늘 그윽한 색깔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문구는 소녀다운 감상쯤으로 치부했는지 늘 무관심하게 무뚝뚝하게 대했다.

어느 날부턴가 ‘가락지’에서 M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집안 사정으로 시골집에 내려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M은 ‘가락지’를 그만둔 후에도 옛 동료들을 통해 이문구의 안부를 묻고 그에 대한 애틋한 감정들을 털어놓곤 했다. 그 절절한 마음은 그때그때 이문구에게 전달됐다.

눈이 몹시 많이 내리던 그해 겨울 어느 날 이문구는 M의 집 주소를 적어 들고 경기도 남쪽 끝 어느 마을에 있다는 M의 집을 찾아 나섰다. 이문구가 찾아갔을 때 M은 조카라든가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있었는데 이문구는 무작정 M의 손목을 잡아 끌어 쏟아져 내리는 눈을 맞고 한참을 걸어야 하는 읍내로 나가 음식을 사 먹이며 자신에 대한 M의 사무친 그리움을 달랬다는 것이다. 그때 M은 음식도 제대로 들지 않고 하염없이 이문구만을 바라보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든가 어쨌다든가.

비단 M뿐만이 아니었다. 1970년대의 이문구는 여러 문인에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문인들이야 언제든 청진동에 찾아가면 이문구를 만날 수 있었지만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 지방 문인들은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상경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순전히 ‘이문구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느닷없이 청진동을 찾아오곤 했던 지방 문인이 있었다. 대전에 살던 ‘눈물의 시인’ 박용래였다. 새벽 첫 열차를 타고 상경해 이문구를 찾은 것도 여러 차례였다.

박용래는 아침나절이건 한밤중이건, 이문구가 바쁘건 말건 할 일이 있건 없건 손목을 잡아 끌고 근처 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같은 사내 간에 그것도 동년배가 아닌 열여섯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처지에 ‘너무너무 보고 싶다’는 표현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는지도 모르나 두 사람이 술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들의 뜨거운 해후 장면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대개 박용래는 이문구의 두 손을 마주 잡고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고, 이문구는 그런 박용래를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와 함께 딱하다는 표정으로 건너다보곤 했던 것이다.

서울은 그래도 대전에서는 가까운 편이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간 지 6년 만에 갑자기 이문구가 보고 싶어서 하루 밤낮 비행기를 타고 와 아침 이른 시간에 이문구 앞에 불쑥 모습을 나타낸 문인도 있었다. 소설가 박상륭이었다. 이문구는 전날 밤 술을 곤죽이 되도록 퍼 마시고 여관방 신세를 진 다음 아침 일찍 출근해 아래층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래고 있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동기생으로 10년 지기였던 박상륭은 이민 간 후 오랫동안 연락이 끊겨 갑자기 그 앞에 우뚝 서 있는 박상륭을 보는 순간 이문구는 눈앞이 아찔하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 박상륭이 죽었구나. 붕정만리 이방에서 죽은 모양이구나. 그리고 혼백만 귀국하여 내 앞에 현시하는구나!’ 그 순간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고 이문구는 후에 술회했다.

어쨌거나 70년대의 청진동은 문인들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후에 이문구는 그 무렵의 청진동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지금도 많은 문인이 그리움으로 추억하고 있듯이 이 동네의 술집들은 단순히 마시고 취해서 돌아가는 ‘업소적’ 의미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문학을 토론하고, 그것의 실천적 의미를 함양하고, 구체적 방법론을 분석하고, 신념과 투지를 확인했던 간판 없는 회관이자 전선(前線)의 영내(營內)였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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