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재계, '대기업 정책'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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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부가 기업들의 재무구조개선이나 투명성 제고등을 이유로 잇따라 내놓은 각종 대기업 정책에 대해 재계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이를 둘러싼 정부와 재계의 시각차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기업의 부실화를 막고 건전경영 기반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시각인 반면 기업들은 이같은 정책은 경기회복은 물론 기업들의 구조조정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주장을 펴고있다.

◇ 정부는 왜 대기업정책을 추진하나 = 정부는 최근 대기업 정책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기업구조조정' 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신재벌정책' 이라는 외부평가에 대해서도 굳이 부인하려들지 않고 있다.

문건이나 책으로 정리된 형태는 아니지만 강경식 (姜慶植)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이끄는 현 경제팀에는 기업정책에 관한 한 일정한 지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 경제팀과 방향이 크게 어긋나는 것은 아니나, 한보이후의 대기업 부도사태에다 최근의 경제개방화로 정책시행 여건은 더욱 무르익었다고 보는 분위기다.

그러나 "정부가 우리 경제 성장의 견인 차역할을 해온 기업, 특히 재벌들의 목을 죄고 있다" 는 재계 일각의 평가에 대해선 언짢은 표정이다.

한보처럼 외부 차입의존도가 높은 대기업의 부실은 경제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만큼 한 기업의 생사 (生死)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게 정부의 입장이다.

당연히 기업이 먼저 재무구조를 개선해야 하고, 이에 대해 증권시장이나 금융시장에서 즉각 평가가 내려지는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기업은 뒷짐을 지고 있고 금융은 왜곡돼 있는 만큼 정부가 나서서 이끌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정책의 핵심은 '아웃소싱 (Outsourcing:외부조달)' 으로 요약된다.

온갖 분야의 기업들을 다 거느리고, 필요한 부품이나 공정을 같은 계열사에서 조달하는 이제까지의 방식은 확대일로의 개방경제에선 이제 안 통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아웃소싱론은 姜부총리의 지론이라 할만하다.

근로자파견제도와 관련, 정부가 재계 편에 서서 법제정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같은 차원이다.

정부는 우리 기업들이 아웃소싱보다 그룹내 일관체제를 고집하고 계열사를 무차별적으로 늘려온 것은 금융과 세제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각종 과다차입 규제책은 기업이 차입을 통해 덩치를 불리는 것이 더 비싼 비용을 치르도록 만드는데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우리 기업들의 차입경영풍토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대기업정책은 크게▶세제및 여신운용, 지급보증금지 등을 통한 재무구조개선과▶결합재무제표도입이나 회장실.기조실에 법적 책임부여 등을 통한 기업 경영투명성 제고로 압축된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대기업정책이 논의되긴 했지만 번번히 시행과정에서 좌초됐었다.

그러나 姜부총리가 오면서 경제팀의 입장이 내부적으로 통일된데다 더이상 정책을 늦추다간 우리 경제 전체가 말라 죽는다는 위기감을 갖게 됐다.

재경원이나 공정위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대마불사 (大馬不死) 식으로 남의 돈을 빌려 덩치를 키우는 기업경영은 더이상 안된다" 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내에서도 이같은 정책들이 너무 강경하고 기업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게 사실이다.

예컨대 2000년 4월까지 완전히 없애게 돼있는 계열기업간 채무보증의 경우 재경원이 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공정위는 다소 유동적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내년 3월까지 자기자본의 1백%까지 채무보증을 줄이는 정도를 봐서 논의하자는게 공정위의 일관된 입장" 이라고 밝혔다.

◇ 재계는 왜 대기업정책 반대하나 = 재계는 최근 정부의 대기업정책을 한마디로 "우리경제의 당면과제가 기업들의 의욕 제고와 경제활력 회복이라는 점을 무시한 정책" 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재계는 정부가 이같은 대기업정책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기업 재무구조 개선' 이라는 대명제는 누구보다도 기업들 스스로가 절감하는 문제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발표한 정책으로는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개선되기는 커녕 자금난과 경영의욕 상실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라는 것이다.

또 재계는 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시기와 속도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욱 (李炳旭) 금융재정실장은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데는 인식을 같이하지만 금융관행의 급격한 변화로 부도를 막기에도 급급한 현시점에서 세부담을 늘리고 규제를 추가로 도입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 이라고 말했다.

모그룹 관계자는 "대선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서 이처럼 대기업들의 목을 조르는 각종 정책들을 쏟아내 놓는 것은 차기 정권이 시작되기 이전에 기업들을 길들이겠다는 생각이 아닌가 하는 우려감마저 재계에 도는게 사실" 이라고 말했다.

결국 재계는 기업들의 재무구조개선은 주식시장과 관련된 각종 규제들을 없애고 금융시장의 자율화와 조기시장개방 등 시장기능의 정상화를 통해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직접 나서 과거와 같은 규제일변도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할 경우 고비용구조는 더욱 고착화되고 기업경영여건만 악화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30대그룹에 편입된 모그룹 고위관계자는 "그동안 정부의 요청으로 은행빚을 안아가며 부실기업들을 인수해 놓고 보니 이제와서는 과다 채무보증이니 출자한도제한이니 하는 각종 규제에 시달리게 됐다" 고 불만을 털어놨다.

또 모그룹 관계자는 "하루하루 어음을 막기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판에 도대체 무슨 수로 계열사들의 빚보증과 상호출자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해소하라는 것이냐" 고 말했다.

재계는 이처럼 기업들이 갖고 있는 빚을 줄이는 것만으로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입장이다.

수익성을 올리고, 내부유보나 자기자본을 늘릴수 있어야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이다.

이와관련 현대그룹 고위관계자는 "그동안 건설이나 중공업등 중후장대한 사업만을 집중적으로 해오다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가 늦어졌고 뒤늦게 이들 분야에 뛰어들다 보니 차입규모가 커진게 사실" 이라며 "지금와서 갑자기 재무구조를 단시일내에 개선하라고 하면 그룹 전체의 경영여건에 지장이 초래될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라고 말했다.

특히 재계는 이번 조치들이 기존의 규제와 중복되거나 상충되는 경우가 있어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논리도 펴고 있다.

같은 계열기업군에 대해 은행등 금융기관이 자기자본의 45% 범위내에서만 돈을 빌려주도록 하는 '동일계열 여신한도제' 는 기존의 바스켓관리제나 거액여신관리제등과 겹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정거래법과도 상충된다는 주장이다.

결합재무제표도입 역시 지주회사설립을 계속 금지하고 비서실.기조실의 기능이 축소돼야 한다는 정부의 의지와도 상충된다는 주장이다.

결국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고 관리할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 재계가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 금융기관들의 책임경영체제가 구축돼 기업의 신용도에 따라 차별적으로 금리를 적용하는 금융관행이 하루빨리 자리잡는 방향으로 금융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고있다.

그래야만 금융기관의 중복적인 채무보증 요구관행도 없어진다는 주장이다.

또 기업들이 주식발행을 통해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99년으로 예정돼 있는 유상증자 요건의 완화와 10대 대기업의 주식발행물량 조정등 주식과 관련된 각종 규제를 앞당겨 풀어달라는 요구이다.

해외자금 역시 좀더 쉽게 얻어 쓸 수 있도록 풀어주고 유상증자를 저해하는 공정거래법상 출자총액규제도 전향적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수호.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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