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대란설 어땠나]與 신·구 갈등서 촉발 YS정면돌파로 해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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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92년 대선때는 10월 대란설이 있었다.

이때도 여당 중심으로 대란설이 진행됐다.

집권당의 전.현직 총재간 갈등이 대란설의 시발점이었다.

김영삼 (金泳三) 민자당 대통령후보는 당 총재직을 이양받은뒤 9월초부터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문제로 노태우 (盧泰愚) 당시 대통령을 공격했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니 선정을 늦추라" 는 요구였다.

여권 신구 (新舊) 권력간 갈등이 본격화하자 9월중순부터 10월 대란설이 신문을 장식했다.

탈당설.신당 창당설이 잇따랐다.

9월18일 盧대통령이 탈당을 공식 선언하자 여권은 최대 혼미에 빠졌다.

중앙일보 기자가 이를 사전에 특종 보도했다.

10월6일 정식 탈당계를 제출하자 민정계 관리인인 박태준 (朴泰俊) 최고위원이 10월10일 동반 탈당했다.

金후보는 광양까지 朴위원을 쫓아가 재고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박철언 (朴哲彦).김용환 (金龍煥).이자헌 (李慈憲) 의원등 5명이 뒤를 따랐다.

金후보는 이때부터 괴력을 발휘했다.

광양까지 쫓아간데 이어 탈당 가능성이 있는 의원들과 민정계 중진을 개별 접촉, 설득했다.

金후보는 이 와중에서도 영호남 대결구도를 타고 여론조사에서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범영남권과 보수층을 중심으로 운명공동체 의식이 발현되며 위기설은 어느새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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