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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칼럼] “No”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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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달 초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이 러시아로부터 재정 지원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지난해 말엔 아이슬란드가 러시아에 금융 지원을 요청했고, 파키스탄은 중국에 자금 수혈을 부탁했다. 전문가들은 이들 사례가 미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퇴조하고 있는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키르기스스탄에 소액이 지원된 걸 빼면 러시아와 중국이 지금까지 큰 도움을 제공한 경우는 별로 없다.

세계는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로부터 중국·러시아 등 다른 나라들이 글로벌 리더십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다극체제로의 전환을 맞고 있다. 5년 전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국제사회의 다극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선언했다. 지난해 9월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중남미가 다극체제 형성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고, 차베스도 동의를 표했다.

미국의 지배력은 확실히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극체제의 질서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리더 국가들이 세계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에 대해 경쟁적으로 비전을 제시하고, 전 지구 차원의 이슈들을 추진해 나갈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은 무극체제의 질서가 태동한다고 봐야 한다. 미국의 주요 경쟁국과 신흥 국가들은 국내와 지역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도 벅차 세계적 책무를 떠안을 여력이 없다.

러시아만 해도 베네수엘라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천연가스가 풍부한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에너지 정책을 조율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고작이다. 남미와 아프리카 지역에 소련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할 의욕이 없다. 지금 러시아 지도부는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로부터 자국의 시장과 은행, 기업을 보호하는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중국은 지구촌 곳곳에 원유와 원자재를 찾아 손길을 뻗침으로써 국제사회에 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중국의 위상은 정치적이라기보다 경제적인 데 국한된다. 혼란스러운 국내 문제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게 중국 지도자들의 우선 과제다. 경기침체로 인한 실업자 양산, 농촌 토지개혁, 환경과 의료제도 개혁을 추진하고 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데 힘써야 할 처지다.

내년 총선을 앞둔 인도의 집권 여당은 소비 보조금, 공무원 임금 인상, 농민 채무 탕감에 재정을 투입하느라 여념이 없다. 브라질은 남미의 정정을 안정시키고 금융위기 여파를 잘 관리해 개발도상국들에 모범을 보이기보단 눈앞의 작은 목표에 급급하고 있다.

요컨대 글로벌 리더십은 공백 상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빈사 상태에 빠진 미국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고 에너지와 의료 정책을 개혁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몰락하는 금융과 산업을 구제하고, 러시아와의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는 해법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그렇다면 누가 새로운 글로벌 금융체제를 창출하는 노력을 이끌 것인가. 누가 기후변화에 대한 다자 합의를 추진하고, 국제 분쟁 지역에서 다자간 안보를 제공할 것인가. 중동 평화협상 때 막후 조정 역할은 누가 맡을 것인가.

지난해 11월 주요 7개국(G7) 모임은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해법을 효율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G20으로 확대됐다. 어떤 문제에 대해 7개국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어려운데 20개국 사이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게 어떨지 상상해 보라. 민주주의, 투명성, 정부의 적절한 역할, 금융시장과 무역에 대한 새 규칙 수립을 놓고 옥신각신할 것을 한번 생각해 보란 말이다. 앞으로 수년간 위기에 처한 국가들이 미국에 도움을 청했을 때 “노”라는 답변을 들을 일이 많아질 것이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예스”라고 기꺼이 말할 수 없다는 점 역시 확실하다.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 그룹 대표

정리=정용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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