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껌딱지조차 그에겐 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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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묘사시(描寫詩)의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받는 시인 김기택(52·사진)씨가 다섯번째 시집 『껌』(창비)을 펴냈다. 『소』 이후 4년만이다. 일상을 꿰뚫어봐 고갱이를 잡아내려는 김씨의 시작 태도는 자신의 발언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는 2004년 미당문학상 수상 인터뷰에서 “대상을 냉정하고 세밀하게 관찰할 때 시가 살아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투시적 상상력을 통한 괴기스러운 시선의 획득은 이번 시집에서도 여일하다.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관을/도로 꺼내려고/소복 입은 여자가 달려든다//막 닫히고 있는 불구덩이 철문 앞에서/바로 울음이 나오지 않자/한껏 입 벌린 허공이 가슴을 치며 펄쩍펄쩍 뛴다//몸뚱어리보다 큰 울음덩어리가/터져나오려다 말고 좁은 목구멍에 콱 걸려/울음소리의 목을 조이자//목맨 사람의 팔다리처럼/온몸이 세차게 허공을 긁어대고 있다 가려움//긁어도 긁어도 긁히지 않는/겨드랑이 없는/손톱에서 피가 나지 않는 가려움.(‘가려움’ 전문)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망극(罔極)의 슬픔을 가려움에 빗대고 있다. 가려움의 고통, 피나 나게 긁어서라도 그것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은 얼마나 강렬한가. 슬픔이 극에 달했는데도 목청이 터져라 울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기만 하는 유족의 몸뚱이를 시인은 긁고 싶어도 긁을 곳이 없어 공황 상태에 빠진 것으로 묘사한다.

‘괴기스러운 돋보기’를 사방에 들이대지만 김기택씨의 시가 늘 침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사소하기 그지없는 껌딱지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표제시 ‘껌’에서 “누군가 씹다 버린 껌”은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빨자국은 인류의 오랜 식육 습관, 그것을 위한 사냥에서 필요했을 살의와 적의를 상징한다. 이런 폭력에 맞서 껌은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 또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짓이겨지거나 찢기지 않는 괴력을 보여준다. 그 결과 껌은 지친 이빨에 의해 내뱉어진 것이다. 버려진 껌딱지를 통해 김씨는 습관화돼 무감각해진 우리 내부의 폭력성, 그것을 이겨내는 한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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