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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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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라는 짐을 모두 내려놓고 거처를 명동성당에서 혜화동 가톨릭대 주교관으로 옮긴 것은 1998년 환란이 세상을 뒤덮었을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를 ‘혜화동 할아버지’라 부르며 10년을 지냈다. 그가 떠난 소박한 집무실의 서가 한쪽에는 연필꽂이로 쓰기에 적당해 보이는 도자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둘레에 쓰인 글귀에 눈이 갔다. “서로 밥이 되어 주십시오.”

 # 1978년부터 꼬박 30년 동안 추기경의 자동차를 운전해 온 김형태씨의 생생한 기억대로 “추기경께서는 차를 타시면 자주 혼잣말처럼 ‘밥’이 돼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추기경은 세상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정신적·물질적·영혼적 양식으로서의 밥이 되고 그것을 서로 나누며 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 정신의 밥=1969년 8월. 로마의 베드로대성전에서 서임식을 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마흔일곱의 젊은 추기경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의 청소년수련원을 찾았다. 당시 학생들은 텐트를 치고 수련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련회 기간 내내 장대비가 계속 내려 학생들의 고생이 심했다. 마침 간이 막사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추기경에게 당시 여고 1학년이었던 김미화씨가 다가가 노트 위에 사인을 부탁했다. 추기경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적었다. “장마에도 끝이 있듯이 고생길에도 끝이 있단다.- 추기경 김수환” 학생 김씨는 그것을 40년 동안 간직하며 삶이 힘들 때마다 꺼내 보았다. 추기경의 그 한마디가 그녀의 삶을 지탱해 준 ‘정신의 밥’이었던 셈이다.

# 물질의 밥=98년 환란위기를 극복하려고 금 모으기 운동이 번졌을 때 추기경은 금십자가를 내놓았다. 옆에 있던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이 “성물인 십자가를 내놓아도 되느냐?”고 묻자 추기경은 “예수님은 세상 구하는 데 몸을 바쳤는데 나라 구하는 일에 금십자가를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답했다. 추기경은 생전에 자기 명의의 통장이나 카드가 없었다. 매달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은퇴한 신부에게 지급하는 250만원을 비서수녀가 대신 출납할 따름이었다. 검소했던 추기경은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이 거의 없이 받은 돈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추기경은 죽어서도 사람들의 밥이 돼 주었다. 추모 행렬이 명동 일대를 휘감으면서 근처 명동상인들은 식당·커피숍·편의점·노점상 할 것 없이 때아닌 특수를 맛봤다. 가뜩이나 힘든 경제의 주름살에 주눅 든 그들에게 추기경은 그 스스로 밥이 돼 준 셈이다.

 # 영혼의 밥=추기경의 사후 각막 기증으로 두 사람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하지만 추기경이 우리에게 남긴 ‘영혼의 빛’은 수백·수천만 명의 사람이 영혼의 눈을 다시 뜨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 길고 긴 추모 행렬은 그 증거 중 하나다. 그런데 그들을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몇 시간이고 묵묵히 견디며 줄 서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시대의 어른을 잃은 상실감이었을까. 아니면 기대고 싶은 분이 졸지에 가신 그 빈자리에 대한 애절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것은 ‘영혼의 밥’을 타려는 길고 긴 행렬이었는지 모른다. 우린 모두 영혼에 주려 있으니깐.

# 어제 우리는 그를 떠나보냈다. 대신 그를 우리 가슴에 묻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의 소망처럼 서로가 서로의 밥이 돼 주는 것이다. 물질로, 정신으로, 영혼으로! 그것이 이 혹독한 시대를 견디고 끝내 이기게 해줄 테니까.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