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함’ 사라져 가는 TV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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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시청자 참여와 인터뷰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주목받았으나 지난 10일 방송을 끝으로 전격 폐지된 SBS ‘인터뷰 게임’.

 몸이 마비되는 루게릭병과 싸우고 있는 박승일(38·전 현대모비스 코치)씨. 그는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의 폐지 소식에 눈물을 흘렸다. 박씨는 힘든 처지에 있는 시청자들이 직접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교양 프로그램인 SBS ‘인터뷰게임’의 열혈 팬이었다. 지난해 6월 첫 방송부터 한 회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달 20일엔 박씨가 아예 직접 출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그는 눈동자를 따라 움직이는 ‘안구 마우스’로 더듬더듬 사연을 보내왔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잊어버린 것 같아 두렵습니다.” 제작진은 박씨가 주변 친구들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10여 차례 사전 미팅도 마쳤다. 그러던 차에 이 프로그램이 갑작스레 폐지됐다. 박씨는 “늘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는 듯한 프로그램에 감명 받았는데…”라며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고 한다.

경제 불황을 이유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던 교양 프로그램들이 잇따라 폐지되고 있다.

루게릭 환자의 인터뷰를 준비중이던 SBS ‘인터뷰 게임’이 지난 10일 결국 마지막 전파를 탔다. 큼지막한 파란색 마이크를 노출시켜 놓고 시청자들이 직접 인터뷰에 나서는 독특한 형식에다 미혼모·홀아버지 등 가슴 아픈 사연들로 마니아층이 형성됐던 프로그램이어서 시청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명품 교양물 폐지에 발끈=현재 이 프로그램의 게시판엔 방송이 종영됐음에도 “시청자들이 참여하는 소박하고 진실된 인터뷰게임이 지속됐으면 좋겠다(smunje)” 등 폐지에 반대하는 글이 끊이지 않는다. 한 포털사이트에선 ‘인터뷰게임 폐지 반대’ 서명 운동까지 벌어질 정도다.

특히 시청자가 직접 질문을 만들고 인터뷰 대상자를 섭외하는 우리만의 포맷은 현재 해외 수출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다. 제작진은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게시판에 글을 올려 “세상 그 어떤 프로그램도 베끼지 않은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며 “이런 프로그램을 지키고 싶지 않은 방송국은 없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실제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직접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해 갈등이 해소되는 과정을 담으면서 훈훈한 감동을 전해왔다. 18세 부부의 사연이 전해지자 후원금이 답지했고, 미혼모 소녀는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갔다. 연출자인 남규홍 PD는 “사람들이 얘기하면 마음이 풀린다는 게 인터뷰게임의 기본 콘셉트”라며 “소통의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오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1인 시위에 나서기도=방송사들의 교양 프로그램 폐지는 지난해 말부터 계속됐다. 불황이 불어닥치면서 상대적으로 시청률이 낮은 교양 프로그램부터 칼바람을 맞은 것이다. 지난해 12월 SBS ‘금요컬처클럽’, 올초 KBS ‘TV 책을 말하다’ 등이 폐지된 게 대표적이다. 특히 EBS 간판 교양 프로그램인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도 폐지 방침이 알려지면서 청취자들이 ‘폐지 반대 모임’을 조직해 1인 시위에 나서는 등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EBS FM 측은 이 프로그램을 비롯해 ‘책으로 만나는 세상’ ‘고전극장’ 등 교양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대신 어학 프로그램을 편성할 계획이다.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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