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중계로 진행된 가이트너 데뷔 무대…그 순간 증시는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세계적 금융위기의 근원이 된 미국 금융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 위한 ‘오바마식 처방’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은 10일 TV 생중계로 총 2조 달러(2790조원) 규모의 ‘금융안정계획(Financial Stability Plan)’을 발표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대책이 부시 행정부에서 만든 부실자산구제계획(TARP)을 대체하는 것으로 지원 액수를 대폭 늘리고, 기업·가계에 자금이 돌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11일 보도했다.

미국 정부의 금융안정대책이 발표된 10일(현지시간) 뉴욕증권거래소의 한 주식중개인이 급락하는 주가를 보며 고민에 빠져 있다. [뉴욕 AP=연합뉴스]


그동안 부실자산구제계획이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비난 여론이 거셌던 터라 이번 대책에 거는 금융권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자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부실자산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민간 자본이 어떤 식으로 참여할지 등 논란이 됐던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빠졌기 때문이다. 정책 자체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다.

◆민관 합동 부실자산 처리=가이트너 장관이 이름까지 바꿔가며 새 정책을 내놓은 것은 그만큼 부시 행정부의 대책과 차별화하기 위해서다. 총 7000억 달러의 부실자산구제계획 자금 중 벌써 절반이 쓰였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비판이 줄곧 제기됐다. 상당액의 부실자산을 떠안고 있는 은행들이 불안감 탓에 정부로부터 받은 돈을 곳간에 쌓아둘 뿐 시중에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금융안정계획에는 1조 달러 규모의 ‘민관 투자기금’을 마련해 금융회사의 부실자산을 매입하는 데 주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당초 정부 자금만으로 운영하는 ‘배드뱅크’ 설립을 검토했지만 방대한 재원 마련 등이 문제로 지적돼 결국 민간 자금을 끌어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와 함께 소비자금융을 활성화하기 위해 자산담보부증권 대출 창구의 지원 규모도 2000억 달러에서 1조 달러로 늘렸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중산층이 집을 압류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도 500억 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기존에 해 오던 금융회사에 대한 직접적인 자금지원도 계속하기로 했다. ‘금융안정기금’을 만들어 은행의 전환우선주를 매입하는 방식이다.

◆시장 반응은 시큰둥=정부의 야심 찬 계획과 달리 이날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가이트너 장관의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뉴욕 주가는 약세를 지속했다. 로이터 등 외신은 이번 금융안정계획의 주요 내용들이 대부분 이미 알려져 있었던 데다 정작 궁금했던 세부안이 공개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시장의 실망감을 키웠다고 분석했다.

시클리프캐피털의 제임스 엘번 회장은 “투자자들은 분명하고 단순하면서도 해법이 되는 것을 원하는데 이 계획은 혼란스럽고 불투명하다”고 비판했다. 부실한 기업을 억지로 연명시킨다는 면에서 예전 정책과 다를 게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윌리엄 이삭 전 FDIC 회장은 “(이번 정책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과거 상품에 새로운 포장만 입힌 것 같다”고 말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도 11일자 사설을 통해 “(부시 행정부) 부실자산구제계획의 아들(금융안정계획)이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우려했다.

◆경기부양안 난항 예상=이와 별도로 10일 상원에선 838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법안이 통과됐다. 하원과 협의를 거쳐 단일법안을 만든 뒤 늦어도 16일까진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을 받겠다는 것이 민주당 측의 계획이다. 하원에서 통과된 법안(8190억 달러)과 규모 면에선 큰 차이가 없지만 단일안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여전히 정부의 방대한 지출 규모를 우려하는 공화당 측 반대가 거세기 때문이다. 이번 상원 최종 표결에서 찬성에 표를 던진 공화당 측 의원은 3명에 불과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밤 ABC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가능한 선택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필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