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생 무너져~ 솟아날 구멍 막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구두 닦으세요.”“…” 천호동 소재 A목욕탕 구두닦이 영철(44. 가명)씨는 일명 ‘딱쇠’처럼 연방 목소리를 높인다. 10명 중 7명은 묵묵부답이다. ‘닦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다.

손님은 줄고 구두약 값은 올라 생활고 급증 …“가계부 쓰기 무섭다” 하소연하는 아줌마 손님도 #구두닦이 영철씨의 ‘신발 밑창’ 경제학

이코노미스트 새벽 5시30분에 출근해 오전 11시45분까지 그가 닦은 구두 숫자는 단 12켤레. 영철씨의 금고엔 1만원짜리 지폐 3장과 500원짜리 동전 몇 개만 덜렁 놓여 있다.

“지난해 말부터 구두 닦는 사람이 부쩍 줄었어요. 아마도 불황 때문인 것 같아요. 외환위기 때만 해도 아침 나절에만 50켤레 이상 닦았는데….”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9년. 영철씨는 한 달에 구두약 상자(24개)를 적게 잡아도 4개 이상 사용했다. 일주일에 한 상자꼴이다. 하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 줄어든 1상자 반밖에 쓰지 못한다. 그만큼 손님이 줄었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물가가 올라 구두약 상자 가격이 1만4000원에서 2만8000원으로 껑충 뛰었다. 그런데 정작 손님이 없으니, 영철씨의 고민은 이만저만 아니다. 쏠쏠한 부업거리였던 ‘밑창 교체’도 요즘은 뜸하다.

영철씨는 자타공인 ‘밑창 갈기’의 달인이다. 원양어선 선원 출신인 그는 남들보다 칼을 잘 다룬다. 그래서 구두 밑창을 떼는 솜씨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하루에 40켤레 이상은 밑창을 갈았어요”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러나 기술보다 불황이 무섭다. 제아무리 빼어난 기술력으로 생산한 제품이라도 살 사람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지금 그의 처지가 그렇다. ‘밑창 갈겠다’며 찾아오는 손님은 하루 1~2명 남짓이다. 그나마 마진을 남기는 것도 쉽지 않다. 구두 밑창의 주 재료인 고무 값이 지난해 초 천정부지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원자재 값 급등’ 현상이 경제구조의 최밑단에 있는 구두닦이의 경영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그렇다고 밑창 교체 가격, 구두 닦는 가격을 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가격을 올리면 가뜩이나 줄어든 손님이 더 감소할 게 뻔하다.

원자재 값 급등 충격, 사회 밑단까지 강타

“지난해 말에 10년간 유지하던 구두 닦는 가격을 2000원에서 500원 올렸어요. 밑창 가는 가격은 아예 100% 가까이 올렸죠. 그랬더니 손님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이것까지 올리면 어떻게 살겠느냐는 식이죠.”

영철씨의 요즘 살림살이는 바닥이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고 그는 말했다. 1999년 그는 종업원 두 명을 둔 어엿한 사장이었다. 종업원 월급으로 180만원을 주고도 350만원은 남았다. 종업원도 없는 지금, 영철씨는 “월 200만원 벌기도 힘들다”며 하소연했다. 구두닦이는 민생의 ‘거울’이다.

그들의 이목은 서민경제의 어려움과 비명소리를 그대로 보고, 듣는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서민을 만나기 때문이다. 때론 수백만원짜리 구두를 신고 다니는 이른바 ‘있는 사람’도, 찢어진 남편 구두를 들고 찾아와서 수다를 늘어놓는 아줌마도 만난다. 게다가 영철씨의 가게는 경기에 가장 민감하다는 목욕탕에 있고, 아르바이트로 ‘때밀이’도 하고 있다.

영철씨의 눈에 비친 민생의 모습은 어떨까? “목욕을 하러 오는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때를 미는 손님은 말할 수 없이 감소했습니다. 목욕비가 오른 탓이기도 하지만 이것이라도 아껴야 산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 같아요. 아줌마들은 가끔 ‘가계부 쓰는 게 요즘처럼 무서운 적이 없었다’는 볼멘소리도 늘어놓죠.”

구두닦이 눈에 비친 민생의 현장

경기침체로 손님 뚝 떨어져
- 외환위기 때 하루 100켤레 닦았지만
- 2009년엔 40켤레도 어려워

밑창 가는 손님도 감소 추세
- 외환위기 때 하루 30켤레 밑창 갈아
- 지금은 1~2켤레 남짓

원자재 고무 값(밑창 가격) 올라 마진 감소
- 외환위기 때보다 구두약 값 2배 뛰어
- 원자재 값 급등으로 밑창 재료 고무 값도 상승

수입은 줄었는데 사교육비는 늘고
- 월 수입 200만원 밑돌아
- 큰아들 사교육비로만 120만원 지출

부업도 시원치 않아 민생고 가중
- 부인 녹즙 부업 매출 경기침체로 ‘반 토막’

서민 중산층 민생고 급증
- 실업공포 사회 밑단부터 시작
- 낮에 찾아오는 손님(실업자)은 늘고
- 목욕탕 거주 일용직 근로자는 감소(노숙자 전환)

바야흐로 가계 부채 4000만원 시대다. 금융권 전체의 가계 부채 총액은 650조원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2001년 말 342조원에서 90% 이상 오른 수치다. 다달이 갚아야 할 대출금이 서민가계를 옥죄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목욕비를 줄이는 것은 가계 긴축운영의 첫걸음이다. 소상공인진흥원이 지난해 11월 자영업체 440곳을 조사한 결과, 58.9%가 6개월 매출(조사시점 기준)이 감소했는데, 이 중 목욕탕이 86.2%를 차지했다.

목욕탕 매출추이가 이를테면 민생의 바로미터라는 얘기다. 민생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영철씨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운동화를 신고 낮에 목욕탕에 오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그만큼 실업자가 많아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 반면 일용직 근로자의 수는 감소한 듯해요. 지난해 10~11월까지만 해도 새벽에 출근할 때 속칭 ‘노가다’를 하러 나가는 일용직 근로자가 많았어요.

목욕탕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최소 30명은 됐어요. 그런데 올해 들어와서 10명 안팎으로 줄어들었어요. 집을 구한 것도, 일자리를 찾은 것도 아닐 텐데…. 아마도 목욕탕 비용조차 낼 돈이 없어, 노숙자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녹즙 파는 부인 돈벌이도 반 토막

일자리 문제는 지금 사회문제다. 조만간 ‘실업대란’이 몰려올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정규직·비정규직은 물론 자영업자도 예외가 아니다. 2008년 자영업자 수(597만 명)는 2000년(586만4000명) 이후 처음으로 600만 명을 밑돌았다. 2007년보다 7만9000명 줄어든 수치로, 하루 216곳의 자영업체가 문을 닫은 셈이다.

임시직(1년 미만 1개월 이상) 또는 일용직(1개월 미만)의 감소도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해 임시직·일용직 근로자의 수는 전년(735만 명)보다 15만 명 감소했다. 하루 410명의 일용직(임시직)이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임시직·일용직 수가 줄어든 것은 2003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이다.

반대로 가계의 채무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개인파산 신청자와 노숙자 수도 증가추세다. 서울 중앙지법에 따르면 지난해 파산 신청자 수는 서울 3만5000여 명, 전국 10만여 명에 달한다. 노숙자 수(서울시)도 2005년 3164명에서 2007년 2929명으로 감소했다가, 올해 다시 3000명 선을 넘어섰다.

영철씨는 슬하에 아들 2명, 딸 1명을 두고 있다. 작은아들과 딸은 체육고, 체육중에 다닌다. 특수종목(펜싱)인 덕분에 별다른 지원이 필요 없다. 비싸야 17만원짜리 칼만 사주면 된다. 학비도 상대적으로 싸다. 문제는 큰아들이다. 올해 수학능력시험을 보는 큰아들에겐 사교육비로만 120만원이 들어간다. 올봄부터는 국사 과목도 추가해야 한다.

월 200만원 벌기도 버거운 영철씨로선 ‘짐’ 하나가 더 는 셈. 사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동갑내기 부인이 2006년부터 녹즙을 팔고 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다. 한때 180만원까지 벌었지만 요즘은 반 토막이 났다. “극심한 경기침체 때문인지 건강식품을 먹는 고객이 많이 줄었어요. 요즘은 잘 벌어야 80만원 안팎이죠.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정말 힘든 야속한 세상입니다.”

서민 중산층은 한국 경제의 허리다. 이들이 무너지면 경제는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게 마련이다. 정부가 서민경제를 살리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골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아직 ‘약효’가 보이지 않는다. 서민 중산층의 붕괴 속도는 오히려 빨라지고 있는 분위기다. 구두닦이 영철씨의 눈에 비친 ‘팍팍한’ 민생처럼 말이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